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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그것이 알고싶다 본문
2001년 3월 4일에 쓴 글.
한국 식품점에서 "그것이 알고싶다" 비디오를 빌려 보았다. 내용은 이민의 밝은면과 어두운 면을 적절하게 섞어 만드려고 한 의도가 보이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몇가지 기억에 남는것은 이민온지 두어달 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자고 일어나면 그냥 행복해요" 라는 말을 연신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사람이 행복하지도 않은데 억지로 행복하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야근과 직장내 경쟁, 애들 교육지옥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이민오고나서 그 모든 것들로부터 일거에 해방이 된 기분이겠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수 있으랴.
아침에 일어나 애들 학교 픽업해주고 무료영어학교에 다녀오고 저녁때는 가족들하고 같이 지낼수 있으니 한국에서는 좀처럼 할 수 없는 생활이 현실로 된 것이다. 여기 무료 영어학교는 적어도 나의 경험에 의하면 무료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성의있게 잘 가르치며 체계도 잘 갖추어져 있어 비교를 한다면 서울 강남의 유명 영어 회화 학원에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직 상태가 석달이 지나고 넉달이 지나면 이런 행복감은 서서히 불안한 마음으로 바뀌게 되고 취업이냐 비즈니스냐를 놓고 고민이 되기 시작한다. 그나마 한국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돈을 얼마간 가지고 올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걱정이라도 할 수 있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사치스러운 걱정이며 그들에게는 생활이 써바이벌 투쟁 그 자체인 것이다.
돈이 얼마간 있고 비즈니스를 물색한다 해도 이것 또한 그냥 "가게 사서 운영하면 되는" 식의 간단한 것이 아니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가게 잘못 인수했다가는 돈 날리고 패가망신하게 되는것은 여기도 예외가 아니다.
수익이 많이나고 탄탄하게 자리를 잡은 사업체는 매물로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나온다 해도 가격이 어마어마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아파트 전세금 빼가지고 온 돈으로는 어림도 없고 그렇다고 변두리 매물을 알아보자니 덜컥 인수했다가 덤태기 쓰는게 아닌지 불안하기도 하다.
내가 본 바로는 비즈니스 알아보는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며 보통 최소 1년 이상 뛰어다니며 알아본 후 사업을 인수하여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업 인수전에 그 사업체에서 주인과 함께 한두달 일하면서 일도 배우고 사정을 알아보는것도 필수다. (사업체라 함은 대부분 컨비니언스 스토어나 세탁소 등 스몰 비즈니스를 말한다)
직장 잡기는 비즈니스 하는것만큼 만만치가 않아서 한국의 졸업장 자격증 경력을 인정해주는 업체는 없으며 오로지 영어와 실력으로 승부를 해야 하는데, 비교적 객관적인 경력과 실력의 증명이 가능한 프로그래머들이 직장을 잘 잡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구직을 위해 200통이 넘는 이력서를 보냈었다. 하지만 면접을 본 것은 겨우 다섯번이었고 다섯번째에 겨우 취업을 할 수 있었는데 매우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면접때 대개는 점잖게 대해주었지만 드물게 모멸감이 느껴질 정도로 수모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이민온 사람들로 채워진 이 토론토라는 도시에는 한국사람들만 대학나오고 유수 업체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이민오는것이 아니다.
대개 출신 국가의 빈곤도가 높을수록 이민온 사람의 조국에서의 위치는 높게 마련인지라 그들의 이력을 보면 대학 나오고 기업체 근무하다가 온 대개의 한국사람들 보다 훨씬 화려하고 다채롭지만 그들의 첫 직장은 육체노동을 하는 공장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가지고 온 돈이 없기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이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하며 그들에게는 영어를 못하면 당장 내일 먹거리가 떨어질 형편이기에 영어를 배우는 것이나 일을 하는것이나 필사적일수 밖에 없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이민온지 얼마안되어 공장에 취직해 다녔는데 그 월급으로는 아파트 렌트비만 겨우 해결되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사람은 가지고 온 돈으로 집도 사고 몇년은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겠지만 돈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 방면에 사업을 해보려는 계획을 가지고 그 쪽의 공장에 취업을 한 것이었다.
이런 치열한 삶의 현장은 한국이나 여기나 마찬가지여서, 느긋하게 9시 출근해서 머그컵 하나 들고 하늘하늘 일하다가 5시 땡치면 굿나잇 하고 퇴근해서 가족들하고 쇼핑 외식할 생각으로 이민왔다가는 큰코 다친다는 것이다. 여기의 삶도 어디까지나 투쟁이고 여기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사실은 한국과 하나도 다를게 없는것이다.
또 하나 그 프로에서 기억에 남는것은 웰페어 몇백불로 생계를 이어가는 어떤 사람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기 에도 힘든 사람들은 있다. 한국의 사회보장과 캐나다의 사회보장을 비교하는것은 의미가 없다. 사회보장이란것은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기때문이다.
여기서 어릴때 이민와서 영어가 유창해도 취업을 못해 힘들게 사는 한국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 웰페어로 사는 사람이 이민을 안오고 한국에 계속 살았다면 한국에서 잘나갔을 그런 사람일까? 그 해답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나의 경험상 한국에서 열심히 잘 살던 사람들은 여기서도 역시 별 탈 없이 잘 산다는 것이다.
이민이란것이 그 사람의 인생 실패에 하나의 원인을 제공할수 있었을지언정 오로지 이민 그 자체때문에 그 사람이 인생 낙오자가 된것은 아닐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민온 지 수십년된 고참 이민자들이 요즘 새로 이민오는 사람들을 보는 눈초리가 고울리가 없다. 그 당시 터무니없이 작은 액수의 외화 반출한도 라는 것이 있어서, 고참 이민자들은 고작 몇백불을 들고 와 막일부터 시작해 사업체도 일구고 집도 사고 애들 교육도 시킨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일단 좀 쉬고 취직은 영어좀 배우고 나서" 알아보겠다는 말은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신규 이민자들도 할 말은 있다. 고참 이민자들이 이민와서 맨땅에 헤딩하기로 고생을 하고 있을때 자신들도 한국에서 그에 못지않게 '박박 기면서'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다. 그 노력의 산물로 얼마간의 돈을 챙겨서 이민을 와 보니 요즘 이민오는 사람들 돈 좀 갖고 왔다고 너무 정신상태가 해이하다는 소리는 결코 곱게 들리지 않는다.
이제 시대가 바뀌고 모든 상황이 변했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것은 한가지 한국이나 캐나다나 모든일에 최선을 다하고 진지하게 살아야 결국 삶이라는 과제속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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