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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진료, 그리고 어눌해진 언어 본문

잡동사니 생각

병원진료, 그리고 어눌해진 언어

민아네 2023. 6. 28. 20:43

나는 캐나다에 살 때에도 영어때문에 늘 답답함을 갖고 살았다.

필요한 언어소통은 한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영어로 대화를 한다손 치더라도 스트레스가 없을 수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이민 1세대는 나와 공통의 답답함을 늘 갖고 있을것이다.

 

영어로 대화를 할 때에는 나는 늘 언어가 졸졸 흐르는 시냇물 옆에 뜰채를 들고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렇게 서있다가 중요한 키워드가 흘러가는게 보이면 잽싸게 그것을 건져내 내 머리속에 순서대로 집어넣은 다음 그것을 조합해서 이해를 하는것이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방법으로 영어를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이게 습관이 되면서 영어의 이해력은 많이 좋아졌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고 내가 늘 대화하던 사람들은 주로 회사사람들이니 대화의 화제나 폭에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재택근무를 하다보니 대화는 더욱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2년이 넘게 집 오피스에 컴퓨터를 셋팅해놓고 콜센터 직원처럼 헤드셋을 쓴 채로 일했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일어나 파자마 차림으로 커피를 든 채 내 책상에 앉아 근무를 시작하는 그 여유와 편안함이 좋았으나 몇 달 지나면서 셋팅해놓은 컴퓨터에서 띵!~~ 하는 미팅 호출콜이 오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내 업무는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하는 경우보다는 주로 컴퓨터 화면에 도면을 띄워놓고 빨간 마킹을 해가면서 미팅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잠옷 차림에 머리에 까치집을 한 채로 업무를 해도 문제가 없었다.

 

아무튼 이제 한국에 왔으니 그런 언어 스트레스에서 많이 해방이 되었다. 거소증, 운전면허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행정 프로세스를 하면서 두리뭉실한 규정때문에 고생도 많이했지만, 공무원이나 은행원들과 어려운 서류에나 쓰이는 용어를 써가며 복잡한 프로세스를 듣고 질문도 해가며 의논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여기가 캐나다고, 지금 내 앞의 저 담당자가 이걸 나에게 영어로 설명하고 있다면 나는 언어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예를들어 이름도 생소한 "출입국 기록에 관한 증명서" "거소신고 사실증명서" 이런 문서의 이름과 그 안에 반드시 들어가야할 정보들을 한국말이 어눌한 외국인에게 설명을 한다고 가정하면 서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까.

 

그러나 한국에 와서도 언어 스트레스에서 완전히 자유로와진것은 아니다.

 

어제 2주전에 방문했던 이비인후과에 다시 진료를 받으러 갔다. 2주전에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 증상은 상당히 호전되었으나, 아직 증상이 없어지지 않았고 다시 슬슬 고개를 들 기미가 보여서였다. 게다가 늘 복용하던 혈압약이 거의 다 소진되어서, 비록 이비인후과이긴 해도 병원 진료과목에 내과도 들어있던터라 내친김에 처방도 부탁을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의사는 당연하게도 그 처방을 받으려면 내과에 가야한다고 했고 나는 그냥 이비인후과 약 처방만 받아들고 병원을 나설수 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들른 내과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의사는 복용하던 약을 그대로 처방해줄 수는 없고, 다시 검사를 한 후에 그 결과에 따라 처방을 해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인데도 그걸 예상하지 못했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처방전을 받으러 간 내과의원에서 나는 얼떨결에 간호사들에게 붙들려서 마치 이리저리 조리돌림 당하듯 혈당측정에 피를 뽑고 소변샘플을 받고 엑스레이에다가 심전도까지 받았다. (내과에서 측정한 혈압이 평소보다 말도안되게 높게 나왔다. 이비인후과에서 전과 다르게 장시간 기다려서 알게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은듯)

 

이 검사들은 캐나다에 있을때도 잊을만 하면 패밀리닥터 클리닉에서 연락이 와서 거의 "강제로" 받았던 검사들이라, 한국에서도 정기적으로 받아봐야지 했던 검사들이라서 한편으로는 저으기 안심이 되는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간호사가 각종 검사에 필요한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토록 빨리 지나가는 언어의 흐름을 나는 도데체가 따라잡을 수가 없는것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설명에 집중하며 영어를 이해하듯 다시 언어의 흐름속에 키워드를 건져내기 시작했다.

 

"....화장실...심전도...저쪽 왼쪽이구요.. 엘리베이터...채혈하실거구요...엑스레이 찍으실께요...가운으로 갈아입으시고요.."

 

이것이 명랑 발랄하고도 빠르게 흘러가던 간호사의 언어속에서 내가 가까스로 건져낸 키워드의 전부였다. 간호사들이 전부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때문에 더욱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도데체 엘리베이터가 어쨌다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는데 그것은 "이 종이컵을 갖고 엘리베이터 사이에 화장실에 가셔서 소변 받아오시구요 받아오신 소변은 저쪽에 트레이에 놓아주시구요" 라는 말이었다. 이 언어의 흐름은 무척 빨라서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것이라고는 손가락을 지칭해가며 "저기로 가면 되나요?" "화장실이...?" "아, 엑스레이말인가요?" 이렇게 되묻는게 전부였다.

 

간호사는 다시 설명을 해주었다.

 

"이 소변용 종이컵을 들어주세요"

"문으로 나가셔서 오른쪽, 보시면 엘리베이터 있어요."

"엘리베이터 두 개 사이에 화장실이 있어요."

"그 화장실에서 소변샘플을 받아오세요."

 

소변샘플을 받아왔다.

 

"저기 티비옆에있는 트레이에 놓아주세요."

"그리고 이 간호사를 따라가셔서 엑스레이 촬영하실께요."

 

간호사가 나를 데리고 엑스레이실에 들어갔다.

 

"상의 탈의하시고 이 가운으로 갈아입으실께요."

"이렇게 끈이 앞으로 오게 입으실께요."...........

 

이런식으로 하나하나 마치 애들에게 설명하듯 다시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어서 무사히 검사를 마쳤다. 간호사들도 끝까지 인내심을 잃지않고 무척 친절하게 응대를 해주었지만 나는 이게 단순히 영어에서 한국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의 언어 문제일까, 아니면 내가 벌써 말귀 를 잘 못알아듣는 노인이 된것일까, 하는 심란한 마음이 드는것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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