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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과 사진/한국에서

가진자의 교만, 전문가의 교만

민아네 2024. 2. 23. 17:44

2003년 10월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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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도 더 옛날 옛적, 내가 사용하고 있던 캐드 소프트웨어에 속칭 엔드유저 서포트를 한다고 미국에서 세일스맨 두엇이 회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엔드유저의 불만과 요청을 현장을 찾아가서 직접 듣고 다음 버전의 소프트웨어에 반영을 한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당시에 그룹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설계전산화 바람이 불어서 회사에서는 캐드 장비와 프로그램에 아낌없이 투자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사용한 지가 겨우 1년 남짓이었던 나는, 그래도 그 분야(캐드)가 재미있어 이것저것 남들보다 많이 만져보았다는 이유로 회의실에 가 앉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미국사람하고 회의하는 일이 드물었기에 내심 불안한 마음으로 가 앉아있었는데, 회의실에는 IT 부서(전산) 사람과 각 설계부서 사람 한명씩이 나와있었고, 미국 소프트웨어 회사 본사에서 나온사람 둘이 나와있었다.

 

IT 부서 팀장의 주재로 각 부서별로 돌아가면서 그동안 느꼈던 개선사항과 불만사항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시판되던 캐드 소프트웨어는 사실 설계 실무를 하는 도구로 쓰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회의는 시작되었고 다들 사용상의 문제점이나 설계시 불편한점 등등을 돌아가면서 발표했다. 회의가 어느정도 진행이 되었을 무렵 나는 그동안 평소 느꼈던 불만을 이야기했다.

 

"프로그램이 너무 느린것 같습니다"

 

이 말을 하는 순간 회의실 분위기는 갑자기 썰렁해졌다. 나는 말을 해놓고 내가 뭔가 발언에 실수를 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회사의 전산부서 사람들은 컴퓨터는 하나도 모르는 무지한 인간이 말같지도 않는 발언을 한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내가 저런 질문을 해서 회사의 수준을 떨어뜨렸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미국사람이 아닌, 우리회사 IT 부서 사람이 빈정대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프로그램이 느린 문제는 빠른 컴퓨터를 사용하면 해결되는 일이고요. (그걸 누가 모르나?) 그의 눈에는 미국 회사는 무조건 우리보다 우월한 존재였고 우리는 한 수 배워야 하는 그런 입장이었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있던 그 미국사람들도 이윽고 정신이 들었는지 앞으로 버전이 업그레이드 되고 하드웨어가 개선이 되면 속도 문제도 많이 좋아질 것이라는, 누구나 내놓을 수 있는 원론적인 답변으로 어물어물 넘어갔고 그날의 회의는 그렇게 끝이났다.

 

우리가 클라이언트, 즉 갑이었고 그 미국 세일즈맨들이 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회사라는, 첨단 기술을 가진 회사라는 선입견에 눌려서 우리 회사 사람들 특히 IT부서 사람들이 저렇게 한심하게 대응을 한 것이었다. 판매자로 온 미국 세일즈맨들은 마치 자기네 안방에 온 것처럼 느긋하게 행동했고 구매자인 우리회사 사람들은 알아서 쩔쩔매는 그런 한심한 광경이었다.

 

그 뒤로 전산부서에서 들리는 이야기로는 설계부서에 컴퓨터는 하나도 모르는 무식한 놈(그때는 컴맹이라는 용어도 없었다)이 미국사람들하고 회의하는데 말도 안되는 질문을 해서 민망해서 혼났다는, 앞으로 컴퓨터 관련 회의는 컴퓨터를 좀 잘 아는 사람으로 골라서 참석시켜야 한다는 그런 뒷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당시 나는 캐드 분야에는 초보였고 그저 사용하다가 느낀점을 솔직하게 말한 것 뿐이었는데 그런 반응을 보니 억울하기도 하고 창피한 생각도 들었다.

그 일이 있은지 한참 후 나는 캐드에 대한 자료를 이것저것 읽다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는데, 내가 느리다고 말했던 그 캐드 프로그램은 소프트웨어 내의 데이타 처리가 모두 플로팅 포인트(소수)로 프로세스 되기때문에 파일 사이즈가 커지고 속도도 현저히 느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사용하던 전형적인 AutoCAD system.

 

일례로 당시 경쟁 소프트웨어였던 다른 회사의 제품은 모든 데이타가 인티저(정수)로 처리가 되어 파일 사이즈도 작고 그만큼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밀도는 플로팅보다 떨어지만 건설 분야에서는 그정도의 정밀도라면 충분하고도 한참이 남는다)

 

그 세일즈 맨이 소프트웨어의 코드를 알리가 없고 따라서 그런 어이없는 반응을 했던 것이다.

세일즈 맨은 그렇다 치더라도 속칭 컴퓨터로 밥을 먹고 산다는 전산부서 사람들이 세일즈맨의 반응에 맞장구를 치고 앤드유저의 불만을 그런 "무식한 질문"으로 간단히 치부해 버렸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몇년 후 내가 미국에 출장을 갔을때 그 회사를 들렀는데 그때 한국에 왔던 그 세일스 맨이 나보고 악수를 하면서 "그때 그 문제는 해결이 되었는가" 라고 농담 반 비아냥 반 말을 했던 생각이 난다. 미친놈.

 

그 후 꾸준히 업그레이드 된 그 캐드 소프트웨어는 아직도 큰 파일 사이즈와 느린 속도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캐드 프로그램을 구동시키기 위해서는 대단히 강력한 컴퓨터가 요구되고 있다.

 

최근 2004년 출시를 목표로 개발된 버전에서는 "작은 파일 사이즈" "빠른 속도"가 연일 광고의 제일 큰,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속도와 파일 사이스는 이 캐드 소프트웨어의 최대의 골칫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10년도 더된,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초보 앤드유저의 불평을, 그저 "무식한 질문"으로 치부해 버리지 않고 한번만이라도 진지하게 검토를 해 보았더라면 지금 그 소프트웨어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유저들을 확보하고 있지 않았을까?

 

아이들은 거짓말을 못한다고 한다. 컴퓨터 초보들도 마찬가지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초보 앤드유저의 작은 불만을 그냥 비웃고 지나가는 것은 정말로 "가진자의 교만"에 다르지 않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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