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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그 냄새가 납니다. 본문

옛날 글과 사진/한국에서

여기는 그 냄새가 납니다.

민아네 2024. 2. 24. 12:55

2004년 7월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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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그 냄새가 납니다.

어린 시절, 나는 영천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어딘지도 모를 아득한 기억속의 영천은, 여름날의 해거름 무렵 찌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땅거미가 질 때면 구수한 흙냄새와 함께 백열등이 하나둘 켜지곤 했습니다.

60년대 골목길 풍경. 출처 김기찬 사진집.

 

풀냄새 흙냄새와 함께 뛰어놀던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부르는 엄마의 소리와 함께 집으로 하나 둘 돌아갑니다.

 

모기향 피우는 냄새와, 땅거미 지는 산자락 풍경을 뭍혀오는 서늘한 바람냄새, 아련히 켜지던 백열 전구, 그리고 가끔씩 군용 찝차가 부르릉 거리면서 먼지를 날리며 지나가면 그 이국적이던 휘발유 배기가스 냄새.

 

어머니는 가끔씩 수박을 사다가 화채를 만들었습니다. 엄마 손을 잡고 수박을 사러가는 그 길은 얼마나 즐겁던지요. 수박값은 50원! 어머니가 잘 익었나 통통 두들겨 보던 그 수박들, 우리 형제도 신이나서 통통 두드려 보고 나름대로 판정을 내렸습니다.

 

신중하게 고른 수박을, 장사 아저씨는 또 삼각형으로 따서 확인을 하고, 삼각형으로 따진 수박은 형과 나도 한 입씩 맛을 볼 수가 있었지요. 이렇게 고른 작은 공만한 수박을, 나일론 그물에 조심조심 넣습니다.

얼음집. 출처 조선일보.

 

다음은 얼음집입니다.

 

하늘색 함석 상자에, 빨간 글씨 한문으로 한 글자가 써 있었고, 한글로 "어름"이라고 써 있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얼음을 바가지에 담아 들고 집에 오면, 어머니는 수박을 반으로 갈라 숟가락으로 떠 내고, 아버지는 얼음에다 바늘을 대고 망치로 톡톡 두들겨서 두부모만한 얼음을 잘게 조각냅니다. 바늘로 얼음을 깰 수 있다니!! 내 눈에는 마술이었습니다.

 

가끔씩 아버지가 우리 형제 손에 바늘과 망치를 쥐어주면, 신바람나게 바늘에 망치질을 하던 우리 형제...

 

수박을 먹고 나면, 풀냄새 섞인 시원한 바람이 붑니다.

 

우리들의 취침시간은 무조건 9시! 아버지가 모기장을 꺼내 방 네귀퉁이에 숭숭 박힌 못에 걸어 모기장을 칩니다. 모기장을 칠 때에는 일단 모기장을 뭉쳐서 제일 작게 만든 다음, 못에 걸고 점점 크게 펴 나갑니다. 그래야 모기가 안 들어 옵니다.

옛날 모기장. 대개 미군부대에서 나온 군용품이었다.

 

아버지가 방안에 칙칙 뿌린 모기약 냄새.. 그리고 모기향 냄새.

 

잠이 안 온다고 칭얼대고 어머니 무릎을 베게 삼아 눕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자장가를 부르며 부채를 부쳐 줍니다. 대나무로 된 부채살이 부러진 곳에서 부채질을 할 때마다 조그맣게 따닥 따닥 소리가 납니다.

 

오늘 저녁, 해거름이 되면서 서늘한 바람이 붑니다.

 

오랜만에 무더운 날이여서, 오래간만에 땀을 흘리며 잔디를 가꾸고 청소를 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뒷마당에 앉아 있으려니, 나뭇잎에 걸린 햇살이 노랗게 화려하게 손을 흔듭니다. 잠시후에 하늘은 검푸르게 변하고, 여름밤의 서늘한 바람과, 흙냄새, 그리고 풀냄새가 밀려듭니다. 그 냄새에 갑자기 어린 시절의 생각이 났습니다.

 

아, 여름날의 그 기억은, 눈물겹도록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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