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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과 사진/한국에서

영어학원 삐끼 습격사건

민아네 2024. 2. 24. 19:15

2005년 7월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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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도 더된 옛날 이야기랍니다.

당시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자기개발비 라고 해서 학원 수강증을 끊어오면 그것에 해당하는 돈을 지급했었습니다. 얼마 안가서 없어지긴 했지만 공짜로 학원 보내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로에 나가서 영어회화학원에 등록을 했더랍니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종로에 외국어 학원들이 굉장히 성업중이었습니다. 다 허물어져가는 건물 안에다가 벌집 모양으로 방을 만들어 놓고 열명 남짓한 사람들을 몰아서 영어 수업을 했는데 강사는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온 백인들 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이상한 점은 왜 강사들은 백인 일색이었을까 하는것이었습니다.

 

영어 학원은 속칭 "물" 이 좋은 편이었는데 왜냐하면 영어회화를 공부하러 오는 여자들이 의외로 외모가 괜찮은데다가 아무래도 "나이트" 같은곳 에서 만나는 여자보다는 건전할 가능성이 높고 (그 중에 밥맛 떨어지는 중증 백인 선호증에 걸린 몇몇만 제외한다면) 그런대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반에는 키가 매우 작고 빽투더 퓨처의 마이클 J 폭스를 닮은, 개고기를 잘 먹는 친구가 강사였습니다. 이 친구가 개고기를 즐겨 먹는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습니다만 엠비씨 TV에서 주한 미국인 중에 개고기 동호회가 있다고 소개를 하는데 이친구가 남한산성 개고기집에서 희희낙낙하면서 보신탕을 먹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어느날, 결혼적령기 청춘남녀가 한자리에 앉아 수업 시작전에 스파크 튀기는 눈길을 주고 받는 우리 클라스에 나이가 한 서른 초중반 남짓한 아저씨 같은 사람이 떡 들어와 앉습디다.

 

머리는 벗겨지기 시작하고 배는 통통하게 나온데다가 딱 붙는 티셔츠를 입었는데 얼굴도 거무튀튀하고 수염도 안 깎았는지 덥수룩해서 영낙없는 동네 쌀집 아저씨였습니다.

 

잠시후에 개고기 선생이 들어오고 이 새로운 수강생에 대한 선생의 호기심 어린 질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오 이럴수가!! 이 아저씨 신입생이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 하는 겁니다.

 

발음이 한국 엑센트도 아니고 좀 야릇한 발음이었는데 말하는걸 들어보니 어릴때 어머니따라 독일에 가서 살았었는데 커서는 한국과 독일을 왔다갔다하면서 살았으며 지금 마침 한국에 들어왔는데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서 어머니에게 돈 십만원 타서 영어학원에 등록을 했다는 것입니다.

 

개고기 선생이 아 그래서 독일 액센트가 있구면요 하더니 그런데 당신은 영어 배울 필요가 없겠는데? 그러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영어를 그렇게 잘 하는데 무슨 영어 학원이 필요하겠습니까?

 

나머지들은 그냥 입을 헤 벌리고 선생하고 그 아저씨 하고 이야기 하는것을 구경이나 하고 앉았다가 얼렁뚱땅 수업이라고 책 몇 페이지 진도 나가고 시간이 끝났습니다.

 

다들 가려고 하는데 이 아저씨가 날씨도 구질구질하고 기분도 그런데 우리 좋은데 가서 술이나 한잔 하까? 그러는 겁니다.

강남의 유흥가.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곳곳에 덫이 설치되어있다.

 

나도 귀가 솔깃 했는데 마침 그날 무슨일이 있었는지 집에 일찍 가 봐야 할 일이 있어서 나는 못간다고 했지요. 비가 왔었는데 학원 현관앞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우리 간단하게 술이나 한잔 하러가자, 내가 강남에 좋은데 알고 있다. 내가 마담한테 얘기하면 껌값으로 즐길수 있다(눈을 찡끗 찡끗 하면서) 이러는 겁니다.

 

영어 강사를 포함한 너댓명이 그럼 한잔 빨러 가자! 고 했고 나머지 사람들과 여자들은 그냥 집에 갔지요. 여자들이 못 끼게끔 바람을 잡았었는데 좀 야리꾸리한 표정으로 "우리끼리만 가자" 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저렴하고 야리꾸리 한 곳이다라는 뜻이겠지요.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다음날 학원에 가니 다들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데요. 이유는 말 안해도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제목에서 아셨겠지만 이 아저씨, 전문 "삐끼" 였던 것입니다. 학원 등록비는? 하루 강의 들어보고 등록한다고 꽁짜로 수업에 들어와서는 한껀 올리고 도망간 것이지요.

 

강남에 어떤 술집에 가서 잘 마셨는데, 어느 순간 이 아저씨가 안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어디 화장실 갔겠지 하고 놀았는데 끝까지 안 나타났지요. (당연하지)

 

나중에 청구된 술값은 천문학적인 액수였고 다들 카드를 긋고 분빠이 하기로 했는데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지금 기억에 한명당 십여만원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개중에는 대학생도 있었는데 이녀석 아주 코가 쑥 빠져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더라구요.

 

열받은 피해자들이 그 삐끼 아저씨를 잡아볼까 학원에 나왔는데 그 사람이 바보도 아니고 나타날 리가 없지요. 야리꾸리에 혹한자 야리꾸리로 망한다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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