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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에는 불이 자주 난다 본문
20090317
2009년 3월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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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구 봉천동에는 달동네라는 곳이 있다. 올라가는데만도 숨이 헉헉 차오르는 그런 언덕을 따라 블럭으로 얼기설기 쌓아올린 집들이 빼곡이 있다.
국민학교 졸업의 학력에 3급 장애인, 노동운동을 하다가 후일 국회의원을 한 이동철(본명 이철용)씨가 쓴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소설은 386 세대라면 아마 다들 읽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후일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이철용씨는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청문회때 전두환씨보고 "살인마"라고 고함을 쳐 다시한번 유명해지기도 했다. 현재는 특이하게도 교회 장로 신분으로 인사동에서 주역을 연구하는 철학원 쉽게 말해 점집을 하고있다.
대뜸 욕설로 시작하는 그 소설속에는 빈민활동을 하는 공병수라는 목사가 나오는데 이 인물의 실제 모델은 허병섭이라는 목사로 오랜 빈민운동으로 후일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본인이 고사하여 제정구씨에게 상이 돌아간 유명한 일화가있다. (제정구씨는 99년 타계)
허병섭씨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평신도와 다르게 특별대접을 받을 수 없다하여 기장에 목사직을 반납하고 미장일을 배워 노동자들과 어울렸는데 지금은 무주의 진도리 라는 곳으로 낙향하여 살고 있다가 최근 길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채 발견되어 사경을 헤메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주: 허병섭 목사는 이후 3년을 투병하다 2012년 타계)
때는 1992년, 소설속에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달동네와 봉천동의 달동네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언덕이다보니 앞집의 지붕은 뒷집의 마당높이가 된다. 덕분에 전망은 과히 나쁘지 않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그리 녹녹치만은 않다.
부부가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방과후에 부모없는 집에 홀로 있거나 혹은 동네로 나와 지저분하고 좁은 골목에서 애들끼리 어울린다.
그러나 달동네 골목은 좁을 뿐 아니라 으슥한 곳도 많고 할일없는 청소년들이 불량스럽게 배회하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기 때문에 그 가운데 아이들이 지낼 공간이 마땅치가 않다.
잘사는 아랫동네의 친구들은 방과후에 학원이나 과외공부를 하러 가기 때문에 친구들과 놀다 올 수도 없어 달동네 아이들끼리 모여 놀 수 밖에 없는데 아이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거나 놀 수 있는 곳이 있을리가 없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달동네 교회나 성당에서 달동네 판자집 하나를 세를 내어 무료공부방을 운영하곤 했다. 아이들은 방과후에 이 공부방에 모여서 같이 숙제를 하기도 하고 수녀님이나 자원봉사자들에게 지도를 받고 또 같이 놀기도 했다.
70년대 대학생들이 진학을 못한 공장 노동자들을 모아 (비속어로 공순이 공돌이라 불리웠던) 야간에 중 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쳤던 "야학" 이라는 무료강습이 90년대 들어와서 이런 형태로 세분화되고 발전한 것이다.
공부 환경이 그러니 물론 공부를 잘 하는 똘똘한 녀석도 있었지만 대개는 민감한 사춘기때 열악한 가정환경탓으로 약간은 반항적인 애들이 많았는데 공부시간에 딴 생각을 하거나 시키는 숙제를 안하거나 혹은 껌을 쩍쩍 씹는 녀석들도 있었다.
이런 경우 나의 역할은 애들 앞에서 친구가 가르치는 동안 굵직하고 실한 몽둥이 하나를 꼬나들고 애들 뒤에서 자세를 잡고 있는 것이었는데 실제 몽둥이를 사용거나 심지어 위협조차 한 적도 없었지만 나의 덩치와 씨리어스한 표정에서 오는 위압감으로 아이들이 고분고분해지곤 했다. 게다가 친구의 거짓말 즉 저 친구는 왕년에 씨름선수였다는 칭찬인지 놀림인지 모를 뻥으로 그 효과는 배가되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책을 보며 강의를 했던 그 시절과 달리 90년대에는 아이들의 학습도구가 바뀌었는데 즉 컴퓨터란 놈의 출현이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잘사는 집 애들부터 하나 둘 컴퓨터를 장만하기 시작해서 거의 모든 아이들에게 컴퓨터가 필수품처럼 되기 시작했는데 그러나 달동네 아이들에게는 이백만원짜리 컴퓨터라는 물건은 도저히 살 수 없는 저 하늘위의 존재였다.
애들이 컴퓨터를 못 가진다는 의미는 단순히 소유를 못한다는 의미 이상의 심각한 의미가 있다.
즉 애들 사이에 "우리는 결국 이런 존재" 라는 패배의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애들에게 컴퓨터를 장만해 주고 싶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어느날 무심코 아이들에게 "컴퓨터 있어면 좋을텐데" 라고 말했다가 어느 아이가 "여기 애들은 이런것 못가져요" 라는 대답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지내던 중 어느날 회사에서 컴퓨터를 교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후장비라고는 하지만 엔지니어링 컴퓨터 설계용으로 쓰던 것이라 일반이 쓰기에는 그때까지도 엄청나게 좋은 기계였다. 게다가 그 당시 신품가격 백만원이 넘던 20인치 일제 칼라 모니터까지...
담당자를 여러번 찾아가 설득하고 그가 요구하는 여러가지 절차를 거친 끝에 교체된 노후장비를 4대를 받는데 성공하였다. 기억으로는 486 PC 베이스로 그래픽이나 메모리가 엄청 강화된 모델에 대형 모니터까지 포함된 장비였다.
장비를 갖다주던 날 시간 약속까지 하고 그 무거운 장비를 옮기느라 회사동료들과 땀을 흘리며 달동네를 올라갔는데 예상과 달리 아이들은 그 컴퓨터를 보고도 별 반응이 없어 어린 마음들이 그다지도 꼭 닫혀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컴퓨터를 다 설치하고 컴퓨터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자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친구들에게 귀동냥으로 들은대로 조심스럽게 마우스를 잡고 하나 하나 클릭해 보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당시에 벌써 달동네 재개발이 진행되는 시점이라 동네 분위기가 흉흉했는데 내가 이민을 온 이후 바로 그 동네에서 재개발 반대 시위가 일어나 철탑위에서 시위하던 철거민이 화재로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는 안타까운 뉴스를 보았다.
재개발이 시작되면 복덕방들이 제일먼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데 이들은 철거민에게 배당된 입주권 딱지를 사고파는 것이다. 철거민들은 입주권을 받아봐야 입주때까지 버틸 자금도 없고 입주시에 내는 잔금도 낼 형편이 안되니 차라리 입주권 딱지를 팔아치우고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동네로 이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딱지라도 받을 수 있는 처지의 사람은 행복한 편인데 달동네에는 주민등록을 하지 않고 그냥 흘러들어와 사는 사람이 다수 있는지라 이런 사람들은 달동네에 법적으로 요구하는 일정기간 거주했다는 기간을 증명할 수가 없어 입주권을 못 받는 것이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달동네 판잣집이나마 자기 집이 아니고 알량한 월세를 사는 극빈자 중의 극빈자들이라 재개발이 시작되면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아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부부가 혼인 신고도 안하고 그냥 동거형식으로 사는 커플이 많으니 세대구성을 증명할 방법도 없어 일은 더욱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주민들의 법적인 인식이 높지 않으니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계약서 한장 없이 구두로 계약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간혹 일부러 집에 불을 질러버리고 그 와중에 전세계약서가 불에 타 버렸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재개발 달동네에서는 불이 심심찮게 일어났는데 집주인들은 그 반대 입장이라 달동네에서 주민들끼리 자경단을 만들어 순찰을 돌기도 하고 간혹 세입자들과 폭력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수년전 한국에 가서 그 자리를 보니 이미 달동네는 다 헐려서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고 거리는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그때 예쁘장했지만 무척 터프했던 수녀님과 동료들 그리고 아이들의 맑은 웃음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