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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도우미 사건 본문
200901
2009년 1월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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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 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일이다.
내 친구 중에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있는데, 당시 나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그 친구가 때때로 얘기해 주는 성당의 조직이라든지 예배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있게 듣곤 했다.
천주교는 잘 알려진대로 여러가지 격식이나 의전, 조직의 규정이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어서, 그 친구 역시 "레지오" 라는 교회내 단체에 소속되어 여러가지 봉사활동을 했는데, 무슨 활동을 하느냐 물어도 레지오 규칙상 봉사활동을 다른 이에게 말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고 인상 깊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 여름날 그 친구가 레지오 단원들과 계룡산 근처로 국내 성지답사 겸 캠핑을 간다고 나보고 같이 가자고 권해서 따라간 적이 있다. 원래 오지랖 성향이 좀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여행을 가기 전 그 친구에게 같이가는 예쁜 여교우가 여럿 있다는 것을 확인했음은 물론이다.
여차저차 해서 대전까지 따라간 나는, 비록 의식에 참여는 안했어도 옛날 천주교 박해때 순교한 성인들의 무덤인 성지답사도 따라갔고, 마침 주일이 겹쳐 대전 시내의 한 천주교 교회에도 따라가게 되었다.
미사에도 참석하겠냐고 묻기에 좀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어, 혼자서 길도 모르는데 교회에 찾아 갈 수도 없고 해서 성당 뒷뜰에 사택과 신도들 점심 준비를 하는 부엌인 듯한 조그만 건물과 앞마당이 있기에 그곳에 앉아 있겠다고 했다.
모두들 미사에 들어가고 나는 그늘에 앉아있는데, 사택쪽에서 한 뇌성마비로 몸이 불편한 사람이 나에게 오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옛날이었으니 지금처럼 깔끔한 휠체어도 그리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아하니 그 사람은 개조한 시커먼 짐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바퀴를 덧붙여 세발 자전거로 만들었고, 페달은 두 손으로 돌리게끔 위로 달아놓아서, 비교적 자유로운 손으로 그것을 돌려 이동하게끔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역시 한국사람의 창의력은 대단하다.
여담이지만 먼 후일 가락동 수산물쎈터 근처에서 회사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만 해도 가락동은 미개발지라, 회사옆에 시유지인 공터가 있고 공터에는 판자와 비닐로 얼기설기 지은 무허가 움막이 빈틈없이 서 있었다.
회사 건물이 높으니 아래를 내려다 보면 그 무허가 움막 동네가 한눈에 보이는데, 잘 살펴보면 비록 허름하긴 해도 냉장고 에어컨 등등 없는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그 안에서 경운기 엔진을 단 조그만 소형트럭까지 만들어져 나오는데, 각 파이프를 이리저리 용접하여 차대를 만들고 엔진을 얹고 변속기, 핸들에 좌석까지 나름대로 규격이 있는지 모양이 똑 같았으며, 텅텅거리는 엔진음을 내며 고물을 산더미같이 싣고 나름대로 잘도 다녔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비교적 온전한 두 팔을 제외한 온 몸과 얼굴이 마구 뒤틀리던 그 양반은 무엇인가를 들고 짐자전거 페달을 돌려 나에게 다가와서는 그것을 나에게 건네는데 받아보니 국수가 담겨있는 사발그릇이었다. 어버버 거리는 말과 몸짓을 보며 당황해 하고 있는데, 어떤 아줌마가 앞치마에 젖은 손을 훔치며 급히 오더니 답답하다는 듯이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 아 그 국수좀 먹여달라는데 뭐하고 있어!
생각을 해 보니 그 아줌마는 교회로 치면 그 날 식사 담당인 권사님 정도 되는 듯 했고, 나는 그 성당에 다니는 청년 혹은 대학생 정도로 생각을 하셨나보다. 역시 성당이나 교회나 권사님의 포스는 대단하다.
나는 얼떨결에 국수사발을 들고 젓가락으로 국수를 집어서 입에 넣어주는 식사 도우미가 되었다. 그양반 입장에서는 내가 여자였다면 더 기분이 좋았겠지만 그래도 내 나름대로 땀을 흘리며 도와주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중에 그게 또 같이 간 성당 사람들에게 알려져 이슈가 되었다. 즉 자신들은 미사 예배에 들어가 경건하게(편하게) 기도하고 있었는데 밖에서는 개신교도가 땡볕에 땀을 흘리며 장애우를 돌보고 있더라.. 뭐 대충 이런 뜻이었다.
나중에는 숙소에서 자기네들끼리 이것을 가지고 밤늦게 신앙토론까지 하는 모양이던데 정말 이런것을 까마귀 날아가면서 배 떨어진다고 하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앉았다가 권사님(?)의 호통에 잠깐 식사 도우미를 한 것 뿐인데, 지금 생각하면 그들에게 식은땀이 나도록 부끄럽고 미안할 뿐이며,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메세지를 주시려고 아무 생각없이멍하게 앉아있는 나를 끄집어내서 식사도우미로 쓰셨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기왕이면 좀 멋있는 직책으로 쓰시지 하필 식사도우미? ㅎㅎ)
사실 그런 봉사로만 따지자면 내가 알기로 그들은 식사 도우미 정도가 아니라 봉천동 달동네 독거노인들의 청소나 목욕등의 궂은 일에서부터 극빈층 자녀들의 공부방 봉사등등 얼마든지 많은 봉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거동이 불편한 독거노인의 청소나 목욕 봉사는 상상 이상의 인내와 수고를 필요로 한다.)
아무튼 그 일로 해서 성당 자매들에게 점수를 많이 받아 인기가 좋았다는 친구의 전언을 듣고 나 역시 살짝 설레는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역시 빙그레 미소가 나오는 좋은 추억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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