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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의 가슴 터질듯한 추억 본문

잡동사니 생각

먼 옛날의 가슴 터질듯한 추억

민아네 2012. 3. 25. 01:21

[다른곳에 썼던 글인데, 정작 내 홈페이지에는 없어서, 그런 글들을 모아서 올립니다.]


먼 옛날 가슴설레는 추억을 얘기해 본다.

고연전 끝나고 종로통에서 술먹고 거리로 나섰다가 데모대에 휩쓸려 아무생각없이 전경 워카발 방패에 매맞고 최루탄 마시고 드럽게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눈썹이 휘날리게 뛰는데

갑자기 온 사방이 슬로모션으로 변하면서 조용해지고 저 앞 어둑한 거리가 밝아지면서 눈물 콧물로 범벅되어 눈을 못뜨고 어떡해 어떡해를 외치던 그녀가 서서히 줌 업 되고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우리 연합써클의 퀸카 미선이. 이대 신방과를 다니던 그녀는 백옥같이 하얀 피부 귀여운 얼굴 쭉 빠진 몸매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하고 명랑한 성격이 더욱 돋보이는 그녀였다.

써클 회식자리에서 그녀가 한번 웃으면 남자녀석들은 입에 털어넣은 막걸리를 줄줄 흘리며 정줄을 놓고 쳐다보았다.

촌놈들 같으니라구. 하지만 나도 그랬다.

그녀는 누군가 고연전에 초대해서 같이 경기구경을 왔다가 이 난리통에 줄 끊어진 연 신세가 된 모양이었다.

나는 날아가듯 돌진하여 바로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어 뛰었다. 우리는 영화의 한장면처럼 추격하는 전경을 따돌리고 종로 2가 지하 음악다방으로 숨어들었다.

커피잔을 앞에 놓고 발개진 얼굴로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펑펑 쏟는 그녀의 얼굴은 더욱 더 고혹적이었다. 내 가슴은 미치도록 두근거렸다.

좀 진정이 되자 우리는 긴긴 시간 얘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갔다.

써클에서 건성으로 대화를 하긴 했지만 그것은 마치 물 위에 떠도는 낙엽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녀의 모든것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그녀와의 대화를 탐했고 그녀 역시 눈을 반짝이며 나의 대화를 빨아들였다. 우리는 손을 잡고 깊고 깊은 심연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어쩌면 호흡이 그렇게 잘 맞는지, 마치 오랫동안 사귀어 온 연인같았다. 그 긴 시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아니, 밖에 경찰들이 좀 더 진을 치고 있어서, 차라리 밤새도록 그녀와 함께 이곳에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었다. 이제 데모대는 다 집에 가고 전투경찰도 닭장차도 철수하고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종로에서 지하철을 타고 성남으로 갔다.

숨어있느라 지금까지 저녁을 못 먹어서 배가 무척 고팠다.

식당을 찾는데 성남은 처음이라 헤메다가 어느 골목에 들어섰는데 모텔이 즐비했다.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가 걷다 힘이 들었는지 내 팔을 잡고 기대왔다.

나의 팔에 그녀의 가슴이 살짝살짝 닿을때마다 나의 심장은 마구 방망이질쳤다.

그녀나 나나 낮에 최루탄을 마시며 뛰어다니느라 땀과 눈물 콧물에 얼굴은 얼룩지고 옷은 먼지를 뒤집어 써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찝찝하고 맵고 끈적끈적하고..

진짜 따뜻한 샤워 생각이 간절했다.

우리 어디가서 좀 씻었으면 좋겠다.

나도모르게 이 말을 뱉고는 스스로 화들짝 놀랐다.

하필. 젠장. 하필이면. 아아 이 빙신아. 이건 아니잖아.
하필이면 모텔간판이 즐비한 이 골목에서 이 타이밍에 천사같은 그녀에게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 영구 바보 천치 쪼다 찐따 빙신아. 속으로 나 자신을 나무라고 나무라고 또 나무랐다.

그러나 그녀는 팔짱을 더욱 꼬옥 낄 뿐 얼굴이 빨개져서 아무말이 없다. 이...이것은 무언의 동의?

나는 가슴이 터질것 같았다.

극도의 긴장으로 목소리는 달달 떨렸고 내 혀는 더욱 꼬여들어 말을 더듬었다.

아하하.. 미, 미선아, 우리 뭐뭐 뭣 좀 먹자. 배, 배고프지?

휘황한 모텔간판 맞은편으로는 식당이 죽 늘어서 있었다.

나는 눈에 보이는 아무 식당이나 들어갔는데 그 식당은 마침 우연히도 원조할매곱창이라는 곱창구이 전문점이었다.

원조할매가 천구백칠십사년에 성남 태평동에서 시작한 이 곱창전문집은 전골도 그만이지만 소주안주로 소금구이가 특히 죽인다.

곱창은 철분과 비타민이 풍부하고 가격도 저렴하며 맛도 독특하여 허약한 사람이나 환자의 회복식 및 보신요리에 좋다.

동의보감에서는 곱창을 '정력과 기운을 돋우고 비장과 위를 튼튼히 해준다'고 나와있으며, '오장을 보호하고 어지럼증을 다스리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오늘 저녁에는 와이프를 졸라 곱창전골을 먹어야겠다.

끗.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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