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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과 사진/한국에서

병원 일기

민아네 2024. 2. 18. 11:47

2008년 4월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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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수술 당일이다.
새벽에 눈이 떠져 도무지 잠이 오지를 않는다.

2인실이지만 나 혼자 있어 TV는 마음대로 볼 수 있다. TV는 하루종일 24시간 하는것 같다. 유선방송에서는 쉬지않고 낮에 했던 프로그램을 되풀이하고 있다. 똑같은 코미디언, 배우, 해설자, 아나운서,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동물들이 이 새벽에 똑 같은 모습으로 똑 같이 울고 웃고 걷고 달리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일상도 역시 저들과 같이 똑 같은 장면을 매일같이 연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같은 수술도 어찌보면 인생에 있어서 수없이 반복되는 작은 점들중 하나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다.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에도 TV속의 그림들은 여전히 욍욍거리며 잘도 돌아친다. 머리가 멍해진다. 이제 몇시간 후면 나는 수술대에 올라가 있을 터이다. 내 생애 두번째의 수술 그리고 처음의 전신마취 수술.

거의 밤을 새다시피 했다. 수액주사 때문에 샤워는 못하고 깨끗이 세수와 양치를 하였다.

수술후 집에 돌아와 산책을 했다. 2006년 어머니 아버지 오셨을 때 같이 사진을 찍었던 벤치.


일곱시 반이 되자 노크소리가 들리고 나를 태우고 갈 휠체어가 들어온다. 휠체어에 실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여러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수술실 이중문 안쪽에는 수술 순번을 기다리는 줄이 있었다. 일렬 횡대로, 움직일 만 한 사람은 휠체어에,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동침대에 누워 수술차례를 기다린다.

간호원이 오더니 수술용 캡을 씌워준다. 예쁘게 씌워주세요 하니 간호원이 웃어준다. 일이분 후에 나의 휠체어는 가차없이 수술실 복도 한켠에 일렬종대로 세워졌다. 잠시후 내 앞에 형을 태운 휠체어가 들어온다. 머리에 캡을 쓴 상태여서 뒷모습으로 구분하기가 힘들다. 보조원에게 물어서 형임을 확인하고 휠체어를 돌려서 마주 앉았다.

형제가 수술실 앞에서 몇 분후 수술을 앞두고 마주 앉았다. 몇가지 농담을 건넨후 내가 먼저 옮겨진다. 멀어지는 형을 보며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며 나중에 보자는 인사를 한다. 멀어지는 형의 표정이 언듯 흐려지는 듯 느껴졌다.

수술실은 무슨 기계 작업장같이 생겼다. 여러가지 기기들이 어지럽게 조합되어있고 그 중간에 수술대가 있다. 수술대의 크기는 침대 사이즈를 상상했는데 그게 아니라 한사람이 겨우 누울 정도의 폭 밖에는 안된다. 대신 팔을 얹을 수 있는 받침이 옆으로 따로 펼쳐 나온다.

간단한 설명을 하는데 내 경우는 혈관이 복잡해서 복강경 수술이 아니라 절개 수술을 한다고 한다. 회복기간이 늘어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소마스크 같이 생긴것을 내 얼굴에 대더니 산소니까 깊이 들이마시세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이 산소가 아니라 마취개스라는것은 나중에 깨어나서 알았다.

전신마취는 생애 처음이다. 마취를 "잠을 잔다"는 것에 비유한 말을 들어서 어렴풋이 그런 줄 알았으나 잠하고는 확연히 다르다. 잠을 자고나면 시간이 흘렀다는 감각이 남는다. 즉 잠을 많이 자고나면 시간이 흘렀다는 느낌이 드는데 마취는 그게 없다.

마취를 하면 몸의 기능이 완전히 멈춘다. 심지어 숨을 쉬는 기능까지 멈추어서 입을 통해 기도까지 산소 파이프를 넣어야 한다. 이때문에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들이 말을 하면 당분간 꺽꺽하는 거위소리같은 목 쉰 소리가 나온다.

말 그대로 완전한 정지, 블랙아웃을 경험한 것이다. 마취개스를 들이마시고 난 뒤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4시간 반에 걸친 수술은 다 끝나고 간호원이 나를 흔들어 깨우던 중이었다.

지독한 잠에서 억지로 깨어난 느낌. 지독하게 졸립다. 누군가 나의 잠을 깨운다. 무의식중에 영어가 튀어나온다.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소리친다. 캔 유 스피크 코리언?? 그 와중에도 웃음이 나온다.

형은 나보다 한시간이 넘게 더 지나서 수술실에서 나왔다.

수술을 받은 나는 정말 말 그대로 눈을 감았다 뜨니 수술이 다 되어있었지만 수술실 밖에서는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피를 말리는 기다림에 초죽음이 되어있었다. 물론 나중에 물어서 안 사실이지만.

바퀴달린 침대에 누워 지독한 잠과 씨름하는 중에 간간히 휙휙 지나가는 천장을 보며 어디론가 옮겨지는 것을 느꼈다. 내 몸이 누군가에 의해 붕 들려져 침대에 뉘어진다. 여기가 내가 회복할 새로운 병실이다. 마취가 점점 깨어가면서 주변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러 색깔이 녹아 소용돌이치는 듯한 시야속에 어머니의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한 얼굴이 언듯 언듯 보인다.

옆에는 너댓가지 주사액 비닐팩이 주렁주렁 매달려 주사액이 내 팔목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오른쪽 옆구리에는 둔중한 아픔이 느껴졌다. 신축성이 있는 파이프 하나가 옆구리에 연결되어있고 그 끝에는 역시 탄력성의 작은 용기가 있어 수술후 복강에 남은 핏물을 빼내고 있었다. 드디어 내 신장 하나가 형에게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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