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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과 사진/한국에서

기적에 관하여

민아네 2024. 2. 18. 12:03

2008년 6월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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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에서 회자되는 우스개 소리 하나를 소개해봅니다.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거지의 돈주머니가 만원짜리 지폐로 넘쳐나는 기적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정답은 지하철 종점이랍니다. ㅎㅎ

이 대목에서 와~~ 진짜? 혹은 왜? 왜 그게 정답이야? 이런 분들은 상태가 심각합니다. ㅎㅎ

내가 만났던 할머니는 아니겠지만, 껌을 팔던 할머니가 별세했다는 소식에 많은 시민들이 추모의 꽃을 놓고 갔다.


지난번 한국에 갔을때, 아침에 병원에 가느라 지하철을 탔는데, 지하철 플랫폼을 내려가는 계단에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한 분이 계단에 앉아서 껌 몇통을 부채같이 펴들고 팔고 있는것이 보였습니다. 복잡한 출근 시간을 피해 간다고 했으니 그때가 아침 열시쯤 됐을 것입니다.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좀 뻘쭘한 생각이 들어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마침 지하철이 와서 그냥 타고 잊어버렸지요.

그 당시는 퇴원을 하고 한 일주일쯤 지났을 때라 살살 나들이를 다니던 때였거든요. 병원에 가서 이것 저것 볼일을 보니 후딱 오후가 되어버렸고, 옛날 친구들을 잠깐 만나고 보니 저녁 일곱시가 되더군요.

무리를 하면 안되는지라 집에 돌아가기로 하고 왔던 순서의 역순으로 지하철을 탔지요. 그런데 표를 끊고 플랫폼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는데 세상에 아침에 봤던 그 할머니가 그 자세 그대로 껌을 팔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차라리 콘크리트 계단 속으로 꺼져버릴 것만 같은 그 초라하고 조그만 등을 보인채, 마치 굳은 돌 처럼 그렇게 열시간 전과 똑 같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하염없이 껌을 들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저 노인네 밥이나 제때 잡숫고 저리 앉아계시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걸었지요. 

- 할머니 그 껌 얼맙니까?
- 천원.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미동도 하지 않은채, 마치 기계응답같은 대답이 더욱 안되보였습니다. 

껌 하나를 달라고 해서 받아들고 지갑을 뒤져보니 아뿔사 천원짜리는 없고 만원짜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안하던 짓 하면 꼭 이런 일이 생긴다니까요. 그 만원을 꺼내서 내미니까 그 할머니는 잔돈을 거슬러 주려고 하는지 허리춤을 뒤지더군요.

갑자기 짠한 마음이 들어서 손사래를 치며 됐어요 할머니 많이 파세요 하고 와 버렸습니다. 갑자기 석고상 같던 얼굴이 환해지면서 아이구 이런 고마울데가.. 하시더군요.

지하철 그 혼잡하고 공기도 안좋은 곳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종일 똑 같은 자세로 쪼그리고 앉아, 껌을 부채같이 펼쳐들고 껌을 파는 그 할머니가 오랫동안 생각에 남았습니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지면서, 푸른 나뭇잎이 더욱 무성해 진 것 같습니다. 작년에 그렇게 눈이 많이와서 집 옆에 쌓인 눈이 내 키를 넘었었는데,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그 자리에는 싱싱한 잔디가 자리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엄청난 행운이 오는 기적을 누구나 다 바라겠지만, 사실 기적은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에도, 내게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껴봅니다.

설마 그 할머니가 "종점의 기적" 주인공은 아니겠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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