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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려도 울리지 않는 북 본문

옛날 글과 사진/한국에서

두드려도 울리지 않는 북

민아네 2024. 2. 18. 12:10

 

고등학교때 같은 반 친구였는데, 이름이 꺼구로 해도 같았습니다. 실명은 개인 프라이버시 존중 차원에서 그냥
넘어가기로 하지요.

이 친구, 엄청 착합니다. 남에게 싫은소리 한번 할 줄 모르고 큰소리 한번 칠 줄 모르는 친구였지요.

그러나 단점도 있었는데 공부가 어지간히 많이 떨어졌고 왠지 모르게 나사빠진 행동을 할 때가 많았으며 체력이 약해서 그런지 행동거지가 참으로 어눌하고 어벙벙한 친구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체육시간에 정말 많은 놀림을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젊은 체육선생이 좀 못된 구석이 
있었던 것이 애들 앞에서 그 친구를 모욕을 주고 놀리고 했었습니다.

뭐, 그때 남자 고등학교에서는 훈육선생이 학생이 껌을 씹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에다 씹던 껌을 짓이겨 발라 버리던 시절이었으니 인격모독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시절이었지요.

그래도 그 친구는 얼굴이 벌개져서 씨익 웃고 말 뿐, 화가 난 표정조차 짓지 못하는 착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70년대 등교길의 시내버스 풍경.


옛날 고등학교에 정문과 후문이 있었고 각각 문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참 재개발 지역이었던 신림동 봉천동 쪽에 사는 애들이 많았던지라, 이 애들이 많이 이용하는 버스는 하교길에는 정문에 한번 정차하고, 학교를 빙둘러서 후문 정류장을 경유해서 가는 시스템이었지요.

학교에 등교할때는 후문에서 내려야 일초라도 빨리 교실에 당도할 수 있기에 애들이 후문에서 다들 내렸고, 집에 갈때는 하나라도 자리에 앉아 가려고 전부 정문쪽에서 타곤 했습니다.

하루는 수업 끝나고 정문에서 버스를 탔습니다. 재수좋게 뒷쪽에 앉았는데 그 친구가 보이더군요. 버스가 떠나
가라 떠드는 아이들 틈에서 뭔가 골똘하게 생각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버스가 다음 정류장인 후문에 정차하자, 이 친구 무엇에 홀린듯 터벅터벅 버스에서 내리더군요. 떠나는 버스안에서 그 친구 얼굴을 봤는데, 가방을 들고 얼굴이 벌개져서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즉, 학교 다 끝나고 집에가는 길이었는데 아침으로 착각해서 학교가는 길인 줄 알고 후문에서 내린 것이지요.

와아.. 와하하하 저 새끼봐라! 지금이 아침인줄 알았나봐. 애들이 웃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 일로 그 친구는 한동안 화제가 되었었지요.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그 친구가 또 화제가 되었습니다. 즉 어떤 친구에게 고민상담을 했는데, 이렇게 말을 했더랍니다.

"야, 너는 두드려도 울리지 않는 북이 있다면 어쩌겠니?"

즉 남몰래 짝사랑하는 여자친구에 대한 고민을 어렵사리 얘기했는데, 고민을 들은 친구가 못되게도 화악 애들에게 다 말해버린 것이었지요.

특히 좀 덜떨어진 행동으로 말 그대로 동네북이었던 친구가 대다수 여자친구 문제로 고민해본 적도 없는 얼치기 유치찬란한 애들보다 한발짝 더 나가 그런 고민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과 또 두드려도 울리지 않는 북 이라는 아주 고차원의 시적 표현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었지요. 그 이후로 "두드려도 울리지 않는 북"은 한동안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물론 나도 예외일 수가 없어서, 철없게도 아이들 틈에 끼어서 왁자하게 웃고 떠들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생각없이 그랬던 것 같고, 그 착한 친구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생각해 보면 너무 미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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