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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과 사진/한국에서

빛바랜 추억

민아네 2024. 2. 12. 21:15

20091203

2009년 12월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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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이틀 휴가를 내어 한가한 시간을 가졌다.
모든 사람들이 학교로 일터로 떠난 주택가의 풍경은 한가롭기만 하다. 날씨가 좋아서, 뒷뜰 창가에 쏟아지는 햇살에 잠시 겨울을 잊고 낮잠을 청해본다.

점심때가 되었는지 집에서 빤히 보이는 카토릭 스쿨에서 아이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잠결에 들린다. 언어만 다를뿐이지 아련히 들리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음은 언제나 햇살같이 화사하기만 하다.

겨울이지만 아직은 영상의 날씨에 햇빛이 눈부신 오후니까, 아이들이 뛰어놀기에는 오히려 안성맞춤인 날씨라 하겠다.

어린시절 신림동 집에서 나의 놀이터는 집 앞 골목이었다. 학교 갔다 온 후 아이들과 전봇대를 골대삼아 축구를 하며 뛰어놀다 보면 어느새 어둑어둑 땅거미가 다가오곤 했다.

시계가 없어도 아이들은 오감으로 귀가시간을 알 수 있다. 밥짓는 구수한 냄새, 생선굽는 냄새, 된장찌게 냄새, 그리고 하늘이 붉은색에서 진보랏빛으로 물들어 갈 때, 골목에 고등학교 다니는 누나 형들이 교복에 보따리만한 가방을 들고 하나 둘 지친 모습으로 나타날 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엄마가 밥먹으라고 부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힘껏 뛰면 금새 모퉁이에 다다를 수 있는 손바닥만한 골목은, 집안에서 눈감고도 지금 밖에 누구 누구가 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정도로 아이들의 감각이 언제나 닿아있는 어린시절의 일부였다.

70년대 개발붐을 타고 지어진 집들은 방음이니, 단열이니 하는 것들과는 별 상관이 없어서, 집안에서도 골목길이나 이웃들의 소리가 아련하게나마 다 들려왔다. 

화창한 날 오후 멀리서 심심찮게 들려오던, 그 칭칭 쿵덕쿵 하던 풍물소리, 깊은 밤 어느집에선가 틀어놓은 들릴락 말락 들려오던 라디오 소리, 베겟~~소옥~~ (베겟속 장사) 카-르나 가위 가르~~ (칼갈이) 하던 행상들 소리, 한겨울 깊은 밤, 잠결에 아련히 들리던 찹쌀떠-억, 메밀묵... 하던 찹쌀떡 장사 소리.

학교 가는 길에는 아이들의 오감을 자극하는 온갖것들이 있었는데 아이들의 코묻은 돈을 노리는 우유 10원 밀크 20원이라 써붙인 불량식품에서부터 조립식 모형 장난감, 뽑기에서부터 이른아침부터 가게문을 활짝 열어놓고 쿵쿵 철커덕 박자맞추는 소리같은 기계를 돌리며 하얀 솜을 풀풀 날리던 솜틀집도 생각이 난다.

어린시절 가끔 아버지가 애들 영양보충시킨다고 사들고 오던 전기구이 통닭은 최고의 먹을거리였다. 닭그림과 함께 "영양 쎈-타" 라는 조잡한 인쇄로고가 새겨진 누런 봉투에는 통닭에서 배어나온 기름이 짙은 색으로 번져있게 마련이었다.

봉투안에는 신문지와 비닐에 싼 통닭과 하얀색 무우깍두기가 들어있었고 백열등 아래 온가족이 둘러앉아 뜯어먹던 그 맛있는 닭고기, 무우의 새콤 달콤했던 맛과 더불어 무엇보다 그 따뜻했던 분위기가 뚜렷하게 생각난다.

당시 닭고기가 요즘의 후라이드 치킨이니 양념닭이니 하는 것 보다 맛이 더 좋았을리 만무하겠지만 어린시절 온 가족이 앉은뱅이 소반에 앉아먹던 그 훈훈했던 분위기는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린다 한들 흉내내지 못할 것이다.

옛날 전기구이통닭 광고모음.


먹거리 변천의 예로 즐겨 사용되는 바나나는, 어쩌다 손님이 한다발 선물로 사오기라도 하면 오래되어 색이 변할때까지 아끼고 아껴서 먹던 귀하신 몸이었다. 한입 베어물면 그 부드러운 질감과 달콤한 맛 그리고 이국적인 향기는 감동 그 자체였다.

요즘 아이들이 거들떠도 안보는 식빵은 "쇼빵"이라고 부르며 과자가 없을때 요긴한 간식 대용이었으며 요리용으로 갖다놓은 물엿을 잼 대신 발라먹기도 하는 요즘 시각으로는 다소 엽기적이라 할 수도 있는 간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면서 다음날 아침에 먹으려 사놓은 식빵 한덩어리를 다 해치워버려 어머니를 난감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틈틈이 모아놓은 레코드판을 네발달린 구닥다리 전축에 걸어놓고 듣곤 했는데 음악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모터가 달려 돌아가는 턴 테이블이 신기해서 장난감 삼아 갖고 놀았다고 보는것이 맞을 것이다.

머리가 조금 커서 전축이나 통키타, 팝송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직접 청계천 등에 나가서 레코드를 사기도 하고 부모님을 졸라 신형 턴테이블을 사기도 했는데 LP 판에서 나오는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들리는 그 음악소리는 꼬집어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아련한 저 편 너머 미지의 소리를 엿듣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서양의 인기그룹 노래를 들으며 한번도 가보지 못한 서양세계의 정경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라디오가 귀했던 시절 음악방송을 듣기위해 광석라디오를 만들어 듣기도 하였는데 광석라디오는 건전지도 필요없고 그저 안테나 단자를 철망같은데 찝어 놓고 귀에 이어폰을 꼽기만 하면 들리는 요술같은 물건이었다. 물론 가격 역시 저렴하여 용돈만 조금 아끼면 부담없이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 들릴듯 말듯한 라디오 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문방구에서 팔던 광석라디오는 이것과 닮은 모양이었다. 아마 이 물건의 카피판이었는 듯.


나중에 CD가 처음 나왔을 때 누군가 들려주었는데 엄청나게 기대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음악을 들었을 때 예상과는 달리 그 느낌은 생뚱맞다고나 할까? 물론 LP판 같은 지직거리는 잡음 따위는 하나 없는 깨끗함 그 자체였으나 오래된 도자기 옆에 놓인 코카콜라병을 보는 것 같은 낯선 기분이 들었었다. 요즘은 일부러 LP판의 지직거리는 잡음을 넣어 파는 CD도 있다하니 아나로그만의 향수는 제아무리 첨단 디지탈이라 해도 도저히 따라잡지는 못하는 것인가 보다.

사회에 나와서도 밤늦은 시간 귀가길 버스를 타면 흐릿한 버스안 불빛에 운전사가 틀어놓은 교통방송 뽕짝음악과 버스의 덜컹거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조화 그 자체였다.

세월이 흘러 모든것들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고는 하나 마음속에 자리잡은 그 따스함은 아직도 옛날 먹거리와 기계들에 자리잡고 있으니 추억이란 그야말로 영원히 아나로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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