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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냄새에 대하여 본문
2006년에 쓴 글.
한국에 살면서 늘 불만이었던 것 중의 하나는 어디를 걸어갈때 어지간히 고즈녁한 골목길을 걷지 않는 한, 걸어가면서 내 발자국 소리를 듣기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변에 소음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소음의 원인은 주로 자동차 소음이었던 같지만, 그것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시끄러운 소리들이 주변에 늘 떠나지 않고 맴돌았습니다.
그 옛날 흙길을 걸으면서 나는 그 구수한 자박 자박 하는 발자국 소리나, 제법 쌀쌀한 초겨울 아침 땅 위로 노란 햇살이 퍼질 때, 서리를 잔뜩 머금은 땅 위를 밟으면 나던 가볍게 와삭거리는 소리, 시려운 귀를 두 손으로 막고 하아 하아 숨을 크게 쉬면 연기처럼 하얗게 나오던 입김, 찡한 코끝으로 들이쉬던 그 겨울날의 차갑고 상쾌한 냄새가 생각납니다.
여름날, 갑자기 소나기가 올 때 후 고무신을 신고 숨이 턱에 차서 달리면, 빗방울에 채여 올라오는 흙먼지 냄새와 젖은 흰 고무신에서 나던 그 찌걱 찌걱 하는 소리... 돌돌돌 흐르는 수정같은 냇물에서 풍겨오던 비릿한 내음, 나무와 풀냄새에 섞여 몰려오던 쏴아 쏴아 하는 풍경소리.
나이를 먹으면서 이런 소리와 냄새는 점점 사라지고, 그 대신 주변에 오토바이 엔진소리, 자동차 엔진소리, 전철의 소음, 배기가스 냄새, 라디오 음악소리, 광고소리가 채워지면서, 그런 옛날의 느낌은 차츰 회색 커튼 뒤로 흐려지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소음이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인이 되어가면서 내 마음속에 여러가지 것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느낌을 다시 경험한 것은 군에 입대해서 였습니다. 군대생활은 한편으로는 어색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또 그만큼 특별하기도 했습니다.
광주의 어느 숲속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야간에 지도를 보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훈련을 받을 때, 달도, 길도 없는 깜깜한 산 속을 너냇명이 한 조가 되어 헤멨습니다. 얼굴에 긁히는 나뭇가지를 헤쳐 걸어가면서 얼굴에 거미줄이 자꾸 감겨서 한손으로 앞을 계속 휘저으며 걸어가야 했었지요.
그러나 길도 없는 깜깜한 숲속에서 발에서 나던 와삭거리던 나뭇잎 소리와 그리고 깊은 한밤중 산속의 냄새, 그리고 수풀이 갑자기 끝나고 시야에 확 들어왔던 노랑달과 그 아래 마을이 생각납니다.
어느날 낮에 작전지역으로 걸어서 이동하다가, 찌는듯한 더위때문에 준비해 간 수통의 물은 진작에 떨어져 버리고, 지독한 기갈에 시달리다 어스름한 저녁무렵이 되어서야 산마루에 다 쓰러져가던 어느 농가를 발견했습니다. 손바닥 만한 마당에 옛날 펌프식 우물물이 있었는데 물을 보자마자 우루루 달려가 허겁지겁 펌프질을 해서 물을 마시기 시작했지요.
외양간 옆에 있던 옛날 펌프식 우물물, 달게 물을 마신 후 보았던 소의 겁에 질린 눈. 그 산자락의 조그만 농가의 누덕 누덕 창호지를 덧댄 장지문에 비치던 노란 백열등과 아련히 두런거리던 테레비 소리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어느날 해안 대간첩 작전 훈련을 한다고 갑자기 비상이 걸려서 갔던 새벽 2시의 동해안은 그야말로 내가 그림속에 들어온 기분이었습니다.
휴지 한조각 발자국 하나 없는 통제구역의 해변에 파도치는 소리, 게다가 쏟아질 듯한 별들.. 그 신비하게 빛나던 백사장을 총을 메고 혼자 걷던 그 새벽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