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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축학 개론 감상평 본문
20120629
2012년 6월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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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축학 개론을 보았다.
건축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직장에서 여태까지 한 일이란 건설이지 건축과는 거리가 있는 일. 학창시절 귓등으로나마 들었던 르 꼬르뷔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벌써 기억의 자욱한 안개속에 거뭇한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영화의 배경은 내가 결혼 후 상당기간 살았던 정릉이었다. 정릉은 그 전까지 살았던 강남의 신흥 타운과는 사뭇 다른 곳이었다.
한창 개발바람이 불 때 강남의 신흥 타운에서는 판자촌이나 논밭이 야트막한 축대를 돌려친 집터로 변하는가 싶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집장사 집"으로 불리우는 기본 단열재조차 변변찮은 날림 주택이 들어섰고, 참을성 없는 사람들이 그 날림이 지겨워질 쯤 아파트가 여기저기 불쑥 불쑥 솟아 올랐다. 마치 옛날 기록영화속의 사물들이 빨리빨리 움직이듯 그렇게 변해버렸다. 그 사이 강북 정릉은 옛날의 영화를 회상하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을 터였다.
정릉은 나의 아득한 코흘리개 어린시절까지 되짚어 올라가는, 두사람이 빠듯하게 지나가는 골목길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으며 허름한 기와지붕밑 들창과 구들장 자락에서 솟아나온 검뎅을 뒤집어 쓴 굴뚝을 흔히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집 앞 골목을 나와 동네길로 들어서면 과일가게 쌀가게 슈퍼 미장원 전업사 문방구 비디오 세탁소 약국 어물전 떡집 청과물 철물점 닭집이 어깨를 맞대고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가게 이름도 하나같이 형제슈퍼, 삼성전기, 대복상회, 뷰-티미용실 (하이픈은 필수) 등등 전혀 고상하지 않은, 그러나 오랜세월 입과 눈에 착 달라붙어 그 자체로 일반명사처럼 불리우는 그런 이름들을 갖고 있었다.
허나 참을성 없고 귀찮은 것 싫어하는 사람들의 본성을 될수있는 대로 충실히 재현해 낸 강남의 아파트와는 편의성 면에서는 비교가 되질 않았는데 이를테면 저녁때 컬컬해진 목을 달래줄 맥주가 생각나면 강남 사람은 냉장고문을 열면 되었지만 정릉 아저씨들은 난닝구에 반바지, 쓰레빠를 끌고 기어이 집 앞 골목까지 나서야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강북에서는 차가운 냉장고 손잡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문만 나서면 길목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그 동네사람들과의 교감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건축이란 딸랑 집만 잘 짓는다 해서 장땡이 아니라 그것이 속해있는 커뮤니티의 기능과 정서에 잘 녹아들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한게 아닐까. 즉 사람이 들어가 사는 집이란 그 속에 사는 가족들과 그 가족이 속해있는 커뮤니티와 충분히 교감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뜻이겠다. (물론 강남 아파트촌이라 하여 사람과 집과의 교감이 없다는 의미은 아니다.)
저 위에 서술한 가게들은 실제로 내가 살았던 정릉의 집에서 몇미터만 나오면 한눈에 볼 수 있었던 가게를 늘어놓은 것이다. 그 작은 거리에 저 많은 가게들이 있었다니 지금생각하니 정말 놀랍다.
우리 식구가 세들어 살던 단독주택 이층집의 일층은 아예 조그만 구멍가게가 세들어 있어 나 역시 위의 난닝구에 반바지 쓰레빠의 강북 아저씨 차림으로 그 가게를 들락거렸으며 게다가 왠지 깔끔하고 예쁜 캔맥주보다는 기왕이면 양많고 듬직한 자태의 병맥주를 즐겨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기쁜 우리 젊은날'에서 안성기가 황신혜를 추억하며 레스토랑에서 병맥주 큰걸로 주문하는 생각이 난다)
오래 전 한국에 가 보니 이 집은 뉴타운이니 뭐니하는 개발로 벌써 예전에 헐려 흔적도 없었으며 어느새 곳곳에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는, 남들 다 따라하는 신식 문물에 버티고 버티다가 마침내 망건을 벗어던지고 버선발로 냅다 뛰는 선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좀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는 내가 지금껏 주절 주절 풀어놓은 이야기를 한마디 대사로 압축한다.
위에 서술한 그런 꼬질꼬질한 구택, 정릉집에 여태껏 살아온 주인공 승민이 엄마에게 짜증섞인 어투로 말을 한다. "엄만 이 집이 지겹지도 않아?"
승민이 '게스' 짝퉁이라고 팽개쳐버린 꼬질꼬질한 '제우스' 티셔츠를 입은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집이 지겨운 게 어딨어? 집은 그냥 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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