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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과 사진/캐나다에서

저녁나무

민아네 2024. 2. 18. 22:01

2010년 5월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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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뒷마당에 피어있는 라일락과 배꽃.


봄이 왔습니다.

겨울의 잔상이 유달리 길게 드리웠던 초봄의 쌀쌀한 날씨를 뚫고 기어코 봄이 왔습니다.

뒷뜰의 라일락 향기는 쏟아지는 햇살과 섞여 더욱 달큰하게 퍼지고, 배나무 꽃은 온 나무를 하얗게 덮었다가, 지난 밤 내린 비에 뒷뜰 잔디를 하얗게 수놓았습니다.

이사올 때는 고만고만했던 나무가, 이제는 제법 키도 커지고 몸통과 가지가 우람해졌습니다.

나무에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과정을 온전히 보는 것은 이곳에 와서도 한참이 지나서였던 것 같습니다.

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나의 감각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그냥 스쳐 지나갑니다.

어린시절 가만히 있어도 온몸으로 진하게 다가왔던 아릿한 풀내음, 뺨에 스치우는 바람결, 빗물 머금은 흙냄새를, 지금은 일부러 의식을 해야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단지 나의 감각이 둔해져서만은 아닐것입니다.

아이들은 이 세상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가면서 그런 귀하고도 소소한 느낌들은 일상이 되어 더이상 신기하지도 새롭지도않게 되나봅니다.

고통도 슬픔도 기쁨도 행복도 시간이 섞여 희석되면 처음의 느낌은 엷어지고 흐려져서, 막연한 여운만을 남기고 사라지나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전에 원하던 것을 갖게되어도 더 큰 행복, 더 큰 기쁨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녁에 산책을 나가봅니다.
황금빛 석양에 물든 잔디와 나무들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 저녁무렵의 노을은 한낮의 태양처럼 강렬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고단했던 하루를 어루만져주듯, 마치 밥상머리에서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주절거리는 손주를, 이것저것 챙겨주며 말없이 빙그레 웃는 얼굴로 바라보는 포근한 할머니의 얼굴같습니다.

 

편안함, 따스함, 행복, 포근함, 사랑, 이런 추상적인 단어들이 실제 모습을 하고 있다면 저 석양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화려한 저녁나무들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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