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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잡이 본문
2007년 3월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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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다나 이민
이 글은 70년대에 캐나다로 이민을 온 분들의 증언을 토대로 쓰여졌습니다. 저자의 동의없는 전재와 인용을 금지합니다. 요즘 이민오는 사람들은 옛날 이민자들에 비해 돈을 많이 가져오는데다가 또 취업도 잘 해서 까마득한 옛날의 이런 비화를 모를 것입니다. 이렇게 생존현장과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이민 이야기가 잊혀져가는 것이 안타까워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모아서 글을 꾸몄습니다.
비는 어제부터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날은 어느덧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창밖을 보던 황상문은 담배를 창밖으로 툭 튕겨 버렸다.
이런 날은 지렁이 잡기에 장땡이었다.
캐나다 지렁이는 딱 한국의 중간치 뱀만하였다. 날이 가물었다가 간만에 비가 많이도 적게도 아닌 딱 이정도만 비가 오는 날씨면, 한쪽 다리에 찬 지렁이 깡통이 금세 가득차서 허리아픈것도 잊은채 신나게 지렁이를 줏어 올리곤 했었다.
황상문은 다시 담배를 피워 물며 눈을 지긋이 감았다.
황상문이 캐나다로 이민을 온 것은 77년, 30년도 더 된 오래전이었다. 당시 황상문은 막 중학교에 입학을 한 상태였는데, 까까머리에 새로 산 교복을 며칠 입어보지도 못하고 이민을 와야 했다.
첫 시험을 죽을 써서 선생에게 매타작을 당하고 어떻게 성적표에 부모 도장을 받아야 하나 걱정을 하고 있던 황상문은 그날 밤 아버지가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는 소리에 철없게도 성적표 걱정에서 해방된것이 그렇게도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미국도 아니고 캐나다라니! 지도를 보니 캐나다는 미국 바로 위에 있는 나라였다. 그렇다면 미국하고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그당시에 테레비에서 보는, 하얀 백인들이 사는 미국은 풍요로왔고 사람들도 어찌나 온화하고 너그럽고 여유가 있든지, 황상문은 미국에 가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도데체가 미국사람들은 다른사람을 그렇게 마음편하게 배려해주고 게다가 유머까지 있는 신사들인지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황상문이 즐겨보던 빅 모로우의 "전투"에서는 독일군의 총탄이 빗발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여유롭게 유머를 하는 것이었다.
또 황상문이 잘 보던 "왈가닥 루씨"나 "뚱보가족" 에서는 미국사람들은 집은 으리으리한데다가 번쩍거리는 큰 쎄단을 타고 다니고 조막만한 애들에게조차 인격을 배려해주고 존중해주는 신사중의 신사였고 애들은 애들대로 그토록 깔끔하고 부티가 나 보이는 것이었다.
손등은 새까맣고 얼굴에 땟국이 꼬질꼬질하게 흐르도록 밖에서 놀다가 어둑해질 무렵 집에 돌아오면 "이놈의 새끼 하루종일 밖에서 뭐하고 쳐 놀다 겨 들어와! 가방 팽개쳐두고 왼종일 놀면 언제 공부할래!" 하면서 소리지르며 빗자루를 들고 쫒아와 휘둘러 대는 그런 엄마는 미국에는 없는 것 같았다.
친구들에게 캐나다로 이민간다고 했을때 친구들의 입에서 나오는 부러움의 탄성도 황상문은 듣기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분이 들떠 노래라도 나올 법한 황상문과는 반대로 아버지의 얼굴은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했다.
난생처음 타보는 비행기를, 그것도 두번씩이나 갈아타고 온 캐나다. 그러나 황상문은 그저 신이 날 뿐이었다. 황상문의 가족은 이민길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을 안 먹었다. 속이 안좋아서가 아니라, 기내식을 먹으면 돈을 내야 되는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외국인 스튜어디스에게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배가 고프지 않다는 시늉으로 한손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손만 내저었을 뿐이다.
2. 캐다나에서의 새출발
황상문의 가족이 처음 들어간 아파트는 영화에서 늘 보던 초원위의 그림같은 집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한국의, 겨울이면 외풍이 숭숭 들어와 방 안에 떠다놓은 대접의 물이 얼어버리는 그런 엉터리 집 보다는 훨씬 나았다.
한참 후에 알았지만 당시 아버지가 가져 온 돈은 달랑 1000불. 당시에는 한국 밖으로 돈을 가지고 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통제하던 시절이라 1000불은 외화반출 한도액에 훨씬 초과하는 액수였다.
아버지는 초과분은 치약의 속을 다 들어내고 치약 튜브속에 돈을 돌돌말아 감추고 출국을 하였다.
처음 들어간 캐나다의 학교는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았다. 말은 안 통했지만 황상문이 입학한 학교는 황상문 같은 갓 이민온 아이들만 모아놓은 학교였기 때문에, 어차피 다른 아이들도 영어를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아이들은 영어를 익히고 적응을 한 다음에, 일반 학교로 전학을 가는 것이었다. 요즘은 이런 학교가 없다.
선생님들은 어찌나 온화하고 친절한지 한국의 선생들처럼 학생들에게 몽둥이 찜질이나 심지어 뺨을 때리는 일은 여기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공부도 도데체 중학교 과정이 한국의 국민학교 4,5학년 과정보다 쉬운것 같았다. 황상문은 그 시절이 제일 행복했다.
그러나 매일같이 공장에 나갔다가 또 가게에 가서 일을하고 밤 늦게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던 아버지는 별로 행복한 것 같지 않았다.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집에서 살림만 하던 어머니는 웨스턴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을 해야 했다. 단지 한국에서보다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발언권이 조금 더 세진 것 같은게 변화라면 변화였다.
캐나다에서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존재의 순서가 애들, 여자, 애완견 그 다음이 남편들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었지만 이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것 같았다.
황상문의 아버지는 술을 조금씩 입에 대기 시작하였고, 그 횟수는 점점 늘어 급기야 만취한 날이면 가족들 앞에서 혼자말처럼 주정을 하기도 하였다.
"크, 여기 사니까 좋나? 좋으나 말이다. 내도 좋다! 쏘주 대신 이래 비싼 양주 실컨 쳐묵으니 좋지!"
어머니는 이민을 올때 캐나다에 오면 된장찌개, 밥 같은것은 안 먹는다며 살림살이 그릇등속을 전부 이웃집에 주고 그 대신 접시를 장만해서 이민을 왔었다. 게다가 파티복은 한벌쯤 있어야한다면서 동네 단골 양장점에서 파티복을 마추려다가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그만두었었다.
그러나 이민을 와 보니 한국사람들은 한국에서와 똑 같이 밥을 먹는데다가 파티는 무슨놈의 파티, 가끔씩 주변 한국사람들끼리 집에 모여 식사를 할 때면 오히려 손님들 음식시중을 드느라 더 피곤한 것이었다.
게다가 여기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엉덩이가 왜 그리 무거운지 한번 남의집에 왔다 하면 열두시는 기본이고 한시 두시나 되어야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낯설고 물설은 외국에 살다 보니 얼마나 가슴에 치받치는 사연이 많을 것이며 또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다보니 만나는 시간도 늦어 자연히 일어서는 시간도 늦어지는 것이리라.
황상문의 어머니는 식사로 고기와 빵을 접시에 담아먹고 매일같이 파티를 하는 상상을 하다가 막상 이민을 와 보니 파티는 고사하고 생계를 위해 식당일까지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했으니 정신적으로 충격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엄마가 식당 아줌마라는 것을 처음 황상문이 들었을때 자존심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않아 금방 잊을 수 있었다. 다행히 여기 친구들은 도데체 부모가 무엇을 하는지, 집이 부자인지 가난한지는 전혀 관심이 없는것 같았다.
황상문도 머리가 커가면서 어렴풋이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아직 황상문은 어렸다.
돈을 벌어서 생활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보다는, 당시에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고급 오디오를 갖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것이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한국 애들은 부모에게서 받은 용돈을 모아서 사거나 혹은 아예 사달라고 했겠지만, 캐나다에서는 애들이 갖고싶은것은 애들이 스스로 돈을 벌어서 사는 분위기였다. 부모가 부자인 애들도 하다못해 집안일을 하고 그 댓가로 부모에게 손을 벌렸다.
캐나다에서는 애들이 용돈벌이로 할 수 있는 일이 심심찮게 있었다. 남의집 잔디깎기, 눈치우기, 시에서 하는 휴지줍기, 낙엽치우기, 수영장 구조요원, 청소, 세차 등등 그리고 애들이 용돈벌이 일을 한다고 하면 대체로 사람들이 너그럽게 돈을 지불했다.
황상문은 방과후에 일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돈을 벌었다.
용돈벌이 일을 하는 바람에 학교 공부가 걱정이 되었으나 영어를 제외한 학교 공부는 아직 그에게는 쉬웠고 특히 수학 과학은 그를 따라올 친구들이 없었으므로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는 한국에서 하던 영어문장 100번씩 쓰기식의 단순작업이 아닌 도서관에 가서 여러가지 자료를 조사해서 완성해야 하는 숙제가 많았기 때문에 늘 시간에 쫒겨야 했다.
그러다가 지렁이 잡이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한밤중에 시골 농장에 가서 지렁이를 잡는 일인데, 이게 그렇게 벌이가 좋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름 한철 벌이인데다가 처음 나가는 사람은 하루 일하고 사흘은 몸져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고된 일이라고 했다.
황상문은 지렁이잡이에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3. 농장의 지렁이 잡이
지렁이 잡이는 늘 해방촌 집앞 밤 아홉시, 웨스턴 로드에서 밴을 타는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살기 시작하던 웨스턴 지역을 사람들은 해방촌이라 불렀다.
십년도 더 된 듯한 낡은, 여기저기 녹이 슬어 빵꾸가 난 닷지 밴이 털털거리며 깜깜한 한밤중의 보슬비오는 어둠을 뚫고 나타나면 사람들은 주섬주섬 깡통이며 상자며 밧데리, 장갑 등속들이 든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하였다.
인공지능이 그린 지렁이잡이 복장. 저 깡통을 타이어를 잘라낸 고무밴드로
양 발목에 묶었다. Image generated by Bing Chat AI.
운전수가 밴에서 내려 말없이 차문을 드르륵 열면, 더러는 팔짱을 끼고 멍하게 서 있거나 더러는 쪼그려 앉아있던 사람들은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 말없이 밴에 올랐다.
지렁이 잡이 밴을 사람들은 멸치잡이 배 혹은 밤배라 불렀다. 끝이 안보이는 허허벌판 평지를 깜깜한 어둠을 한없이 헤치고 달려가는 밴은, 말 그대로 망망대해를 헤쳐나가는 밤배와 같았다. 가도 가도 끝없는 어둠이었다. 황상문은 마치 바다위를 털털거리며 항해하는 고기잡이 배를 탄 기분이었다.
차 안에서 사람들은 간간히 농담이나 안부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굳게 입을 다물고 모자란 잠을 청하는 듯 눈을 감고 있거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 밖을 응시할 뿐이었다.
밴은 털털거리며 하염없이 어디론가 달렸다. 밴은 한참을 그렇게 달리다가 어느 농장앞에 멈추어섰다.
농장은 그야말로 지평선이라, 지렁이 잡는 날 달이라도 밝으면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하게 넘실대는 바다를 보는것 같았다.
머리에 광부들이 하는 후레쉬와 허리에는 묵직한 밧데리, 한쪽 장딴지에는 톱밥이 든 큼직한 깡통, 다른쪽에는 지렁이 깡통, 그리고 작업용 장갑으로 무장을 한 지렁이잡이들은 마치 작전에 나가는 군인들 처럼 표정에 비장함마저도 감돌았다.
"자, 오늘 작업은 4시까지 합니다. 4시까지 지렁이 갖고 집결하시요!"
늙수그레한 운전수 가이드의 외침을 뒤로하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이 운전수는 "지렁이 박"으로 불리우는 사람으로 지렁이 중간상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사서 지렁이를 잡아오게 한 다음, 일당을 지급하고 그 지렁이는 캐나다 회사에 팔아넘겨 이익을 보는 것이다. 들리는 뒷 소문으로는 이 사람도지렁이 잡이로 섭섭치 않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황상문은 김씨 아저씨와 같이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람들이 미스타 김이라고도 부르는 김씨 아저씨는, 사람이 서글서글하고 말을 구수하게 잘 풀어나가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는 지렁이 잡이 경력 3년의 베테랑이었다.
그의 말로는 그는 중사로 월남전에 참전해서 월남 안디엠 이라는 곳에 있다가 베트콩과 전투가 붙었는데, 부대원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생존자 중 하나라고 했다.
특히 김씨 아저씨가 들려주는 짜빈박 전투는 실제 전투를 보는것처럼 너무나 생생해서 어린 황상문은 손에 땀을 쥐고 듣곤 하였다.
전투장면에서 그는 표정에 감정까지 넣어서 "소대장니임- " "김중사-" "쾅 쾅 두두두두.." "으악~" 하면서 효과음까지 넣는 것이었다.
4. 지렁이는 소리와 빛에 민감하다.
언뜻언뜻 비치는 후라시 라이트 사이로 검은 나무들이 보였다. 8월이라고는 하지만 토론토의 밤은 서늘했다. 찬 보슬비가 내리면서 땅거죽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 분위기는 귀신이라도 나올듯이 으시시하고 기괴했다.
"베트콩이 매복해있는 밀림하고 똑 같구만!"
김씨 아저씨가 한마디 뱉었다.
"이럴때는 말이야, 에무십육을 이렇게, 응? 지향사격자세로 잡고 말이지, 응? 발소리가 안나게 최대한 은밀하게, 응?, 은밀하게 기동하는거다. 군대 전문용어로 기도비닉이라 카는기라."
김씨 아저씨는 콧똥을 연신 킁킁 뀌어가며 마치 적들이 드글드글한 밀림을 가듯이 어디선가 줏어든 나무 막대기를 총같이 거머쥐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수색대 흉내를 낸다.
지향이고 기동이고 황상문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였지만 아무튼 김씨 아저씨의 흉내는 매우 진지했고 황상문은 그것이 재미가 있었다.
전방에 매복중인 지렁이 발견!
김씨 아저씨가 황상문을 보고 히쭉 웃으며 먼저 쪼그려 앉았다. 보슬비가 오는 농장의 풀바닥은 말 그대로 지렁이가 우굴우굴하였다. 캐나다의 지렁이는 굵기가 손가락만한데다가 길이는 웬만한 뱀 길이다. 심약한 여자애들 같으면 소리라도 지르련만 지렁이 잡이를 나온 사람들에게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500마리 깡통당 20불짜리 노다지와 진배가 없는 귀하신 몸이다.
비록 미물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을 잡으러 오는 것을 아는지 불빛과 사람이 다가가는 기척이 느껴지면 확 움츠러들면서 땅속으로 도망을 가기 때문에 이놈들이 숨기전에 잽싸게 잡아채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를 해서 잡아채면 지렁이가 끊어지고 상품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지렁이 잡아채기는 고난도의 숙련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장딴지에 찬 깡통에는 지렁이가 500마리 들어간다. 지렁이란 놈이 허리를 반쯤 내밀고 있으면, 잽싸게 손에다 다른쪽 깡통에 든 톱밥을 뭍혀서 그놈을 낚아챈다.
먼저 후레쉬가 간 곳에 지렁이가 열댓마리 엉켜있으면, 어떤 놈부터 잡아채야 할지 머리를 슈퍼컴퓨터처럼 돌려 눈깜짝할 사이에 판단을 내려야 한다. 우선순위가 잘못되면 한두마리를 낚아채는 동안 다른 놈들은 벌써 땅 속으로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지렁이는 몸통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움직이는 생물이다. 지렁이잡이 고수들은 이 원리를 철처히 몸에 배도록 숙지하고 있었다. 지렁이를 낚아챌때에는 먼저 지렁이 끝 부분을 은근히 잡고 잡아채는 듯 하다가 일단 느슨하게 당김을 살짝 푼다. 그러면 지렁이 몸통이 순간적으로 수축을 하는데 이때 무리없이 주-욱 잡아다녀야 하는 것이다.
너무 빨리 잡아당기면 지렁이가 끊어지고, 너무 느리면 다른 놈들이 도망을 가버리기 때문에 수확이 형편없어진다. 끊어진 지렁이는 값을 쳐주지 않기 때문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것이 아니었다.
지렁이잡이 경력 3년의 김씨 아저씨는 흥얼흥얼 하면서 마치 국수가락을 줍듯이 시원시원하게 지렁이를 집어담고 있었지만, 어린데다가 초짜인 황상문은 구슬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해도 양 허리에 찬 깡통은 여직 바닥이었다.
몇시간을 쪼그리고 앉아 지렁이를 뽑아 올리다 보면 허리가 끊어질듯이 아팠다.
지렁이 깡통이 꽉 차면 미리 갖다놓은 나무상자에 촤르륵 부었다. 나무상자에 모아놓은 지렁이들은 후래쉬빛을 받으며 붉게 번들거리는 몸통을 징그럽게 꿈틀거렸지만 황상문은 그게 모두다 시퍼런 딸라돈으로 보여서 흐뭇한 기분까지 들었다.
언젠가는 김씨 아저씨가 나무상자 있는 곳에서 육두문자를 쓰며 길길이 화를 내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누군가가 김씨 아저씨가 애써 잡아놓은 지렁이를 싹 훔쳐가 버린 것이었다. 김씨 아저씨의 나무상자는 눈에띄게 줄어있었다.
지렁이 도둑이었다. 분명히 같이 온 일행중에 누군가가 김씨 아저씨의 지렁이 상자에 손을 댄 것이었다.
새벽에 집결지에서 보니 평소에 반 상자도 못 잡던 제니할머니가 오늘은 모처럼 만땅으로 잡은것으로 봐서 강력하게 심증은 갔지만, 평소에도 단단히 심술이 난것처럼 사람들의 접근을 불허하는 제니 할머니를 지렁이 도둑으로 지목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라 김씨 아저씨는 속상한 마음을 달래려 담배만 뻑뻑 피워댈 뿐이었다.
지렁이는 그자리에서 현금박치기로 일당이 지급되었다. 다른 일자리처럼 일하는 사람이 불체자(불법체류자)인지 미성년자인지 따지지도 않았다. 누구나 지렁이를 잡아서 갖다주면 두말않고 손에 현금을 쥘 수 있었다.
에누리없이 한깡통당 20불, 열 깡통이면 200불. 당시 20불이면 굉장히 짭짤한 액수였다.
지금은 부촌으로 알려진 로얄요크에 사는 어떤 한국사람은 빈손으로 이민와서 온 가족이 밤마다 고생고생하면서 지렁이를 잡아 만든 종자돈으로 가게를 샀다.
그 가게가 잘 되어서 지금은 큰 집에 고급차를 굴리는 알부자가 되었고 자식들도 고생을 알아서 그런지 다들 열심히 공부해 전문직으로 잘 풀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5. 농장에서 만난 괴물
지렁이를 하루에 40깡통 이상 잡는 사람을 사람들은 우스개 소리로 신(God)이라고 불렀다. 40깡통이면 800불이었다! 당시 800불은 웬만한 2베드 아파트의 월세를 내고도 남는 돈이었다. 단 하룻밤에 아파트 한달치 월세를 버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손에 꼽을정도로 적었고 보기 힘들었다. 황상문도 신이라는 사람과 같이 작업을 해 본적이 있으나 왠일인지 그날 그 신의 실적은 별로 시원치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하룻밤 사이에 지렁이를 40깡통 잡는다는 것은 최고로 숙달된 사람이 밤새 보슬비가 내려서 농장이나 골프장에 지렁이가 한껏 드글드글하게 올라올 때 올릴 수 있는 실적이고 게다가 그런 경우는 일년에 한두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라고 했다.
서울에서 공대를 나왔다는 박씨는 오래전부터 지렁이 잡는 기계를 발명한다고 설쳤었다. 그가 중고로 구입한 진공청소기를 뜯어고쳐 만든 지렁이 잡는 기계를 들고 왔던 날 사람들은 호기심에 시범을 보려고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 지렁이 잡는 기계로 빨아들인것은 진흙덩이와 다 뭉게진 지렁이 몇마리 뿐이었다.
또 지렁이 잡이로 어느정도 쌈지돈을 마련한 어떤 사람은 토론토 근교 시골에 아예 지렁이 농장을 지어서는 지렁이를 사육해서 납품을 하려고 시도하다가 영 지렁이가 번식을 못하는 바람에 그 고생고생해서 번 돈을 다 날리고 다시 지렁이 잡이로 나섰다는 소문도 돌았었다.
지렁이 잡는 기계나 지렁이 농장 같은게 가능했다면 이 영악한 캐나다놈들이 왜 그걸 안 했겠는가? 그게 힘드니까 이렇게 우리에게 일당을 줘 가면서 이 일을 시키는 것이지. 황상문은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했다.
황상문의 얼굴은 땀과 비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오늘같은 날은 황상문같은 초보도 잘 하면 10탕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지렁이가 잘 잡혔다. 사람들은 지렁이 한 깡통 가득을 한탕이라 불렀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비가 부슬부슬 오는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황상문은 한가닥 후래쉬 불빛에 의지해서 흥얼흥얼 지렁이를 줏어 올렸다.
한참 지렁이를 잡다 보니 김씨 아저씨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황상문은 은근히 뒷통수가 근질근질해지면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사내녀석이라지만 이제 겨우 중학생이 비오는 깜깜한 밤중에 무인지경 허허벌판에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꺼림칙한 일이었다.
"아저씨! 미스타 김 아저씨!"
제법 소리를 높여 불렀으나 대답이 없다. 황상문은 일부러 흥얼거리는 노랫가락 소리를 약간 높였다. 그때 멀리 앞쪽 수풀 덤불에서 바스락 하는 인기척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저씨?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황상문은 와락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귀신은 아니겠지? 그러면 늑대가 나온것이 아닐까? 아니면 곰?
그때 황상문의 바로 뒤에서 훅 하는 뜨거운 김이 느껴졌다. 기겁을 해서 확 뒤를 돌아본 황상문은 입에서 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두 팔을 짚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바로 코 앞에는 집채만한 그림자가 싯푸른 화등잔같은 눈을 하고 황상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후라시 빛에 반사된 진한 녹색의 짐승 눈에서 나오는 안광이 더욱 몸서리치도록 무서웠다.
잠시후 그 눈은 나즈막히 소리를 냈다.
"음무우~~"
그 농장에 있던 소였다. 황상문의 비명을 들었는지 김씨 아저씨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야! 뭐야! 뭐야! 상무이 어딨노!"
황상문이 아직도 얼굴이 허옇게 질린채 더듬거리며 이야기를 해 주자 김씨 아저씨는 박장대소를 했다.
"야 이자식 이민오기 잘했네! 겨우 소새끼 한마리에 그리 질겁을 했냐? 그렇게 약해빠져가지고 한국에서 군대갔으면 맨날 빠따다 빠따!"
어린 마음에 너무 놀라서였는지 아니면 지렁이 잡이가 너무 고되었는지 황상문은 그날 집으로 와서 꼬박 이틀간을 꼼짝 못하고 앓아 누웠어야 했다.
두달 후 황상문은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500불짜리 전축을 구입할 수 있었다. 집에 몇몇 한국친구들을 불러모아 전축에 판을 걸어 음악감상을 했을때 황상문은 돌아가는 판을 보며 주문처럼 이렇게 중얼중얼대는 것이었다.
"한마리, 두마리, 세마리...."
친구들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황상문은 이렇게 말했다.
"이게 지렁이 잡아서 산 전축이거덩. 레코드 판 한바퀴 돌 때 마다 지렁이 한마리씩 희생되었다는 뜻이지."
황상문은 자신이 대견하다는 듯 흐뭇한 기분으로 키득거리는 것이었다.
(끝)
주) 토론토의 초기 이민자들을 인터뷰하여 조사를 했는데, 워낙에 오래된 일이라 직접 지렁이잡이 경험이 있는 분들도 기억에 따라 혼동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렁이 값은 3.8리터짜리 두깡통 (천마리)당 20불 내외의 수준이었고 값은 그때 시세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며 대략 18불에서 24불정도였습니다.
3.8리터면 큰 페트병 콜라 두개 반의 용량입니다. 또 초보자의 경우 잘 잡힐때는 하룻밤에 5천마리 (100불), 경험자의 경우 만 오천마리(300불) 고도로 숙련된 사람의 경우 드물게 4만마리 (800불)까지 잡았습니다. 밤새 보슬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의 밤에는 지렁이가 땅 위에 드글드글하게 기어올라왔으며 이런 날은 대박을 치는 날이었습니다. 지렁이잡이에 나온 사람들은 이런 날씨를 "날씨가 좋다"라고 했습니다.
작업씨즌은 4월에서 10월까지, 피크는 4월에서 6월까지, 시간은 해 지고 나서 새벽까지 6-7시간을 했습니다. 6시간 일하고 300불 이상을 버는 직업은 요즘도 많지 않은데 하물며 당시에는 대단한 수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렁이 잡아서 가게 샀다는 말도 틀린말은 아닐것입니다.
또한 보통의 경우 한 장소에서 모이면 운전자가 데리러 오는 방식 외에 운전자가 집집마다 돌면서 태워가는 방식이 있었고, 작업은 주로 토론토에서 서쪽이나 북쪽으로 2-3시간 떨어진 골프장이나 농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지렁이는 주로 낚시 미끼로 미국에 팔렸다고 하며 60년전에는 그리스 출신 이민자들이 지렁이를 잡기 시작해서 한국인들이 들어왔고, 그리고 요즘은 베트남사람들이 주로 지렁이를 잡으러 다닌다고 합니다.
지금은 한국사람들 사이에서는 거의 까마득한 전설처럼 잊혀져가고 있는 지렁이잡이다 보니 이야기가 돌면서 왜곡도 많고 과장도 많아지는것 같습니다. 간혹 지금도 그리스사람들이나 한국사람들도 소일삼아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