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Home

이민괴담 본문

옛날 글과 사진/캐나다에서

이민괴담

민아네 2024. 2. 24. 20:47

2006년 3월에 썼던 글입니다.

------------------------------------------------------------------------------------------

 

캐나다 생활 7년차인 A씨. 유학을 하고 캐나다에 눌러앉았지만 변변한 직업을 가져 본 일이 없다. 하긴, 토론토서 동양철학을 전공한, 그것도 졸업이 아니라 수료한 유학생에게 캐나다에서 일자리를 찾기란 쉽지만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에게는 이민비자가 나온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한국에 들어가 몇번 선을 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캐나다에 와서 살고 싶다 한들 번듯한 직장도 없고 그렇다고 모아놓은 재산도 없는 그에게 기회를 주는 여자는 찾기가 힘들었다.

 

그는 토론토 시내의 한 편의점에서 헬퍼로 일하고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청승맞게 내리던 어느 초여름 밤이었다. 비가와서 그런지 손님도 뜸했고 밖에 보이는 거리 풍경도 스산하기만했다.

 

휴대폰으로 얼마전에 만난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초라하게 차려입은 한 3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백인남자 손님이 들어와서 NHL 스포츠 복권을 달라고 했다.

캐나다 온타리오 스포츠복권 광고.

 

A가 꺼내주는 복권을 받으며 그 백인남자는 말했다.

 

- 이번 수요일에 몬트리올하고 뉴욕아일랜더하고 붙지? 내가 장담하는데 몬트리올이 이길거다. 스코아는 3:2, 어떻게 아느냐고? 나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초능력이 있거던.

 

농담이겠거니 하고 하하 웃으면서 오, 그래? 그것 참 좋겠다. 하고 응수를 해 주었다.

 

며칠후 편의점에서 신문을 정리하다가 스포츠란을 보니 몬트리올이 3-2로 이겼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 거 참, 그 친구 신통하네, 나도 복권하나 사 둘걸 그랬나.

 

그날 저녁에도 비가 내렸다. 웬 비가 이리 자주 내린담, 하면서 우산없이 버스 정류장까지 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난번에 왔던 그 백인남자가 또 들어왔다.

 

- 거 봐라. 내가 뭐라든? 몬트리올이 이긴다고 했지? 내일은 템파베이하고 버팔로 게임이지? 내일은 버팔로가 이긴다. 스코아는 6-4 다. 너도 복권좀 사 놓으면 내일 재미좀 볼거다.


- 오 그래? 너 참 좋은 능력이 있구나.

 

그날은 A 씨도 복권을 샀다. 그것도 다섯장이나. 그 다음날 A씨는 가게에 출근하자마자 신문부터 뒤졌다. 당첨이었다. 졸지에 공돈 500불이 생긴 A씨는 신바람이 났다. 은근히 그 초능력의 사나이가 기다려졌다. 내일 저녁에도 게임이 있는데.

 

초능력의 사나이는 그 다음날도 어김없이 나타나서 천기를 누설, A씨에게 500불의 행운을 안겨 주었다.

 

A씨는 은근히 안달이 났다. 스포츠 복권이란것이 여러 게임을 한꺼번에 예상해서 맞추면 그만큼 배당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초능력의 사나이는 처음부터 한꺼번에 승부를 예언해서 배당금을 왕창 딸 수 있는것을 왜 한 께임씩 감질나게 맞추는 것일까.

 

- 야, 그거 처음부터 승부하고 스코아를 다 맞추면 몇배를 벌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안했니?

 

- 그건 말이지, 내 초능력은 24시간 앞 밖에 내다 볼 수 없거든. 그것도 꼭 스포츠 경기만 알 수 있어.

 

하키 씨즌이었다. 거의 매일 경기가 열리고 있었고, 아쉽지만 당일 경기만 따라다니면서 맞춰도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릴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마치 약이라도 올리려는듯이 다음날부터 초능력의 사나이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초능력의 사나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속칭 도인이란 자들이 의례껏 자신의 신비감을 더하기 위하여 모습을 보일듯 말듯 감질나게 애를 태우듯이 꼭 그런것 같았다.

 

A씨는 은근히 헛김이 샜다.

 

내일은 하키 결승이 있는 날이다. 복권을 왕창 사서 잘만 맞추면 대박이 될 수도 있는데, 초능력의 사나이는 여즉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 초능력의 사나이가 나타나서 귀뜸을 해 준들 그 말을 믿고 복권을 왕창 사는 것도 미친짓이리라.

 

작년에 대기업 과장으로 있는 대학동창 친구가 캐나다로 출장을 와서 만났을때 생각이 났다. 그 친구는 한국 회사생활이 너무 힘들고 미래가 안보인다며 이민을 왔으면 하고 A 씨에게 이민에 대해 진지하게 물었었는데 A씨는 펄쩍 뛰며 정신나간 소리 그만하고 한국에서 회사생활이나 착실하게 하라고 손사래를 쳤었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한국에서 제대로 된 직장에 다니면서 안정적인 삶을 사는 그가 너무나도 부러웠었다.

 

요즘 가게 주인은 가게를 팔려고 내놓은 상태였다. 뜸하지만 몇몇이 가게를 보러 다녀갔다. 가게 주인이 바뀌면, 깨알같은 수입이나마 있는 이 일자리에 A씨가 계속 붙어있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국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코딱지만한 가게에서 그것도 저녁 파트타임 헬퍼로 쥐꼬리만한 보수를 받으며 일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심한 신세만큼이나 우울하게 컴컴한 거리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초능력의 사나이가 예의 빙긋 웃는 웃음으로 가게문을 들어선 것은.

 

A씨는 순간적으로 너무 반가운 나머지 화들짝 놀라듯이 두 팔을 뻗었다.

 

- 어이 잘 있었나? 내일 결승이지? 결과가 궁금하지 않나? 너 내일부터 나 못 보게 될거다. 내일저녁 달라스하고 캘거리지?

 

초능력의 사나이는 카운터에다가 신문지에 둘둘 말은 무엇인가를 툭 놓았다. 신문지 옆으로 삐죽 나온것은 군데군데 비에젖고 땟국이 줄줄 흐르는 20불짜리 현금 다발이었다.

 

A 씨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이거 5000불이다. 모두 스포츠 복권 다오.

 

가게에는 그만한 금액의 복권이 없었다.

 

A 씨는 아까 가게주인이 집에 가기전에 늘 사용하는 비밀 장소에 무엇인가를 감추는것을 보았었다. 가게 뒷문으로 돌아가는 안보이는 코너에, 천장 등 옆으로 천장 석고보드 좌로 2칸, 우로 4칸 지점을 위로 푹 누르면 비밀장소가 나온다.


가게주인은 A 씨가 모르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지만, 언젠가 가게주인이 없을때 열어보았더니 조그만 상자가 있고 안에는 2천불 정도가 들어있었다. 물론, 그 돈이 없어지면 제일먼저 A 씨가 닥달을 당할것은 뻔한 이치였기에, 게다가 2천불이 작은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손을 댈만한 큰 액수도 아니었기에 침만 한번 꿀꺽 삼키고 말았었다.

 

가게 주인양반은 요즘같이 강도가 설치는 흉흉한 시절에는 안전이 최고라면서 어느정도 매상이 오르면 현금출납기에서 돈을 꺼내 그곳에다 감추곤 했다. 혹시라도 강도가 들어와 홀랑 털려도 현금 출납기 안에 든 돈만 날리면 되기 때문이다.

 

- 내일은 어디가 이기나?

 

A씨의 질문에 초능력의 사나이는 빙긋 웃었다.

 

- 그건 비밀이다. 왜? 너도 끼워줄까? 너 돈 있냐?

 

- 잠깐 기다려. 복권이 그만큼 있을라나 모르겠다.

 

A 씨는 비밀장소로 갔다. 천장 보드 좌로 2칸, 우로 4칸. 조심스럽게 위로 밀어올리자 어둠속에 조그만 상자가 보였다.

 

'딱 천불만 빌리자. 더도 말고 딱 천불만.'

 

마음속에서 수없이 다짐을 하고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연 순간 A 씨는 숨을 흐읍 하고 들이 쉬었다. 상자 안은 지폐 다발로 가득했다.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통째로 꺼내 화장실로 갔다. 상자는 제법 묵직했다. 가게 주인이 가게를 팔려고 어느 작자에게서 계약금을 받아놓은것이 분명했다. 수표로 받아야 했겠지만, 그리고 이런 큰 돈은 집에 가져가야 했겠지만 지금 A씨에게 그런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슴이 뛰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대충 봐도 2만불은 됨직했다.

 

그 길로 가게문을 닫고 초능력의 사나이와 길을 나섰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는 가게란 가게는 다 훑고 다니며 복권을 미친듯이 긁어 모았다.

 

그 많은 복권을 밤을 새서 승부와 스코아를 기록한 후에 날이 새자 입력을 했다. 가게 따위는 어찌되든지 좋았다. 오늘 밤 경기가 끝난후 가게로 찾아가서 주인에게 사과를 하고, 동시에 거머쥐게 된 거액의 행운을 말하리라. 잔뜩 화가 나 벼르고 있던 가게주인은 순간 얼빠진 얼굴이 되겠지.

 

그깟 2만불, 5천불 더 붙여서 갚고, 나는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입가로 헛웃음을 흘리며 새벽길을 딛는 A씨의 발걸음이 비장했다.

(끝)

 

 

'옛날 글과 사진 > 캐나다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미 자동차산업을 위한 제언  (0) 2024.02.25
지렁이잡이  (0) 2024.02.25
3차원 프린터  (0) 2024.02.24
광복절 소회  (0) 2024.02.24
우리 아이는 몇등인가요?  (0) 202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