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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생각

님 놈 나부랭이

민아네 2013. 11. 18. 10:09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처음 입사하여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채 복사나 하면서 해맑은 얼굴로 어리벙벙하게 앉아있는데 복도에서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큰 소리가 났다.

 

싸움이 난 것이다. 대학교육까지 받은, 정장에 넥타이 맨 사람들이 바로 그 넥타이를 서로의 자존심인양 꼬나쥐고 육두문자를 날리고 있었다. 둘 다 회의를 막 마치고 나오는 길인 것 같았다.

"이 새끼야, 니가 거기서 그럴 수 있어?"
"뭐라, 이 새끼? 이걸 확 마!!"
"확 마? 이 과장 새끼가?!"

과장새끼.

그 말은 나에게 차라리 충격이었다.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 '과장님'은 '과장'도 '과장놈'도 아니요 어디까지나 '과장님'일 뿐이었다. 결재라도 받으려면 한 단계 거치고 또 거쳐야 비로소 다다를 수 있는 높이, 하루종일 낑낑대던 업무를 반말섞인 전화 몇통으로 슥슥 처리해 내는 그 인맥과 실력, 인자한 말로 한마디 하면 그날은 얄짤없이 야근을 해야 했던 그 권위.

그런데 '과장'도 아니고 '과장새끼' 라니!

업무상 마찰이 생기면 목소리의 볼륨이 점점 에스컬레이트 되다가 드물긴 해도 임계점을 넘는 순간 "당신 몇살이야!!"라는 고함을 신호로 멱살잡이가 시작되었다.

목소리의 볼륨에 반비례하여 대리님, 과장님 하던 호칭은 바햐흐로 수직 낙하하기 시작하는데 '님'이 제일 먼저 탈락하고 다음 수순으로 그 자리에 '놈'이 붙으며 멱살이 잡힐 즈음에는 '나부랭이', 다음 수순으로 '새끼'가 붙게 된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어서였을까? 사무실 안에서 다들 담배를 피워대니 실내는 안개가 낀 것처럼 늘 자욱해서 그 분위기와 잘 맞아 떨어졌다.

과장새끼.
과장새끼.

과장새끼라는 말은 순진한 신입사원의 머리속에 오랫동안 맴돌았다.

자신을 지칭할 때 존칭인 '님' 자를 붙이는 것은 통상 결례로 친다.
해서 보통 자신을 소개할 때 저는 박사님입니다, 회사의 과장님입니다, 저는 교수님입니다, 목사님입니다, 혹은 스님입니다, 이렇게 소개하지는 않고, 그냥 과장입니다, 교수입니다, 목사입니다. 승려(중)입니다 이렇게 통상적인 명칭을 사용하는게 보통이겠다.

여기에 더해서 자신을 낮추는 의미에서 몇가지 비하성 어미 語尾를 붙이기도 한다. 직업별로 비하성 어미는 다양하게 사용되는 것 같다.

가장 많이 쓰이는게 '질' 이라는 어미다. 대표적인 예가 교수질, 선생질(훈장질)인데 요즘에는 다른 직업에도 잘 붙어다닌다. 의사질, 약사질, 순사질, 면장질 등등 수없이 많고 심지어 목사질 중질이라 하여 성직에까지 질을 붙이는 판국인데 차포떼고 본론만 보자면 예로부터 머슴질 같이 노동직에 사용되던 어미를 응용하여 겸양을 표현하자는게 핵심 의도겠다.

'나부랭이'라는 말은 원래 종이 헝겊등의 자투리라는 뜻인데 수많은 직업군 중에서 유독 '기자'와 궁합이 잘 맞는 듯 하다.

그러나 질이든 나부랭이든 번듯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이런 비하성 어미를 붙이며 자기소개를 하는 말을 들으면, 가끔은 자신의 직업은 선망의 대상이라, 이런 비하성 어미로 미리 달래줄테니 변변치 못한 상대는 질투를 삼가라는 의도가 슬쩍 엿보이기도 하여 듣는 상대에 따라 오히려 불쾌함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 부작용이 있다 하겠다.

예로부터 겸손은 미덕이지만 지나친 공손은 예의가 아니라 했으니 (謙讓之德 過恭非禮 겸양지덕 과공비례) 자기 낮춤은 경우에 따라 경계하여 사용할 일이다.

살아오면서 만난 수없이 많은 종류의 사람 중에는 놈(년)도 있었고 님도 있었다. 주로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직업이나 직책 뒤에 '님'을 붙이느냐 '놈'(년)을 붙이느냐로 판가름된다. (놈, 년은 성 구별에 비교적 자유로운 한국말 중에서 엄격하게 사용되는 성 구분 단어겠다.)

나 역시 당연하게도 어떤 이에게는 놈이 될 때도 있었고 다른 이에게는 님이 될 때도 있었으리라. 허나 분명한 것은 님이니 놈이니 하는 것은 남이 붙여주는것이지 내가 스스로 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생각에 제일 무난한 해법은 스스로를 칭할 때의 명칭은 아무런 높임이나 낮춤이 없는 기본형을 사용하고, 그 뒤에 님이나 놈(년), 나부랭이 같은 어미는 그게 무엇이 되든 남들에게 맡겨놓는게 맞지 않을까 싶다.

내가 잘 하면 가만있어도 '님'자가 붙을것이요 영 탐탁지 않으면 자연스레 '놈(년)'이 붙을것이다.

그런데 겸양을 해도 비례니 뭐니 말이 많은 판국에 오히려 자신을 대놓고 높이는 경우도 있으니 이런 분들은 하도 몸에 걸쳐야 하는게 많아서 요즘말로 '개념'을 깜빡하고 안 챙긴 경우라 하겠다.

옛날 한 고승이 자신의 주장자를 앞에 놓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주장자는 스님이 법상에서 법문을 할 때 사용하는 지팡이를 말한다.

"여기 내 주장자가 있으니, 일체 도구나 손을 대지 말고 이 주장자를 짧게 만들어 보아라."

많은 제자들이 어려워하고 있을 때 한 제자가 말없이 주장자 보다 긴 작대기를 갖다가 주장자 옆에 놓았다. 그랬더니 긴 주장자가 비로소 짤막하게 보였다. (長短相較 장단상교)

모든 일은 작대기 옆 주장자처럼 상대적이요 그러니 지금 여기서는 내가 '님' 이라도 저기서는 '놈', '나부랑이', 심하면 '새끼'가 될 수도 있는 일이라, 님 소리 들으려면 나 부터 살펴야 할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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