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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과 사진/캐나다에서

성인과 군자와 잡놈

민아네 2024. 2. 19. 20:59

2017년 10월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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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회사에서 레이오프 당하고 황당한 마음으로 지내던 시절. 경력과 실력이 이정도 있으니 재취업은 금방 되리라 생각하고 기다리던 나날들.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도 취업은 커녕 잡포스팅조차도 눈씻고 찾아볼 수도 없었던 암담했던 시간들.

 

평탄한 회사생활 십년이 지나고 귀동냥으로만 들었던 '스카웃'도 경험했으니 자만심은 높아만 갔고 남부럽지않은 연봉과 여유있는 근무가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하던 무렵, 교만이란 놈이 슬슬 자라고 있었으니... 동료와 밥벌이의 지겨움을 논하며 평생 닭장같은 회사 사무실에서 이렇게 지내야 하는 것인가를 한탄하기도 했었다. 그때 농반 진반으로 늘 말하던 것이 '회사 관두고 딱 반년만 정줄놓고 맘껏 놀았으면 좋겠다' 였다.

 

회사라는 온실 밖은 처절한 정글이라는 현실을 모르는, 참으로 호강에 받쳐 요강에 풍덩 빠질 철없는 투정이었다. 

 

직장에서 레이오프당하고 상당기간 인터뷰 기회조차 없었던 나날들. 생각해보니 이제 이 나이에 재취업은 물건너 간 것 같고 그렇다고 은퇴할 나이는 아닌것 같으니 가게(컨비니언스 스토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를 하는 한국사람이야 주변에 널렸으니 조언을 들을 사람을 찾자면 무궁무진했지만 다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가게한다고 날뛰다가 큰 돈 날리지 말고 차라리 있는 돈 까먹으면서 지내라는 것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고마운 조언을 해 주었지만 한결같이 결론은 신중론이었다.

 

대도시 가게들이 힘들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기에 조용한 시골 가게를 보러 다녔는데 몇군데는 마을도 예쁘고 깨끗하고 집도 좋고 저렴하기까지 하여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었다. 이 나이에 가게 시작해서 떼돈 벌 것도 아니고 그저 있는 돈 까먹지 않은 수준으로만 유지하는 선에서 운영하다가 미련없이 접고 은퇴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생각처럼 간단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6개월이 되던 날 기적적으로 현 직장에 재취업이 되었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이 직장에 일을 시작하고 며칠 안되어서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던 다른 여러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오퍼가 들어오기도 하였다. 새 직장은 토론토 지하철 교통공사였다. (TTC, Toronto Transit Commission)

 

지난 회사에서 짤리기 전 입에 달고 다니던 "반년만 놀았으면 좋겠다"라는 철없는 투정이 진짜 현실이 되었던 셈인데 그 반년동안은 실상은 하나도 좋지도 즐겁지도 않은 그야말로 괴로운 고뇌의 기간이었다. 이래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반년뒤에 재취업이 될 줄 알았다면 마음놓고 놀았을 것 아닌가? 그러나 하루 아니 일초뒤에 일어날 일도 깜깜하게 모르는 인간인지라 미련하게도 그 시간을 괴로움으로 채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이것은 그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지엄한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모른다면서 이렇게 확실히 일어날 일은 잊은 채 아둥바둥 살아간다. 그래서 때로는 아무 생각없이, 때로는 심지어 나의 손톱만한 이익을 위하여, 내 마음과 남의 마음에 상처를 내면서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있는 인생길을 걸어간다.

 

내가 취업이 안되어 전전긍긍하던 때에 같이 진심으로 걱정해주던 사람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저 아무개네 아저씨가 회사에서 짤렸대. 큰일이네. 쯧쯧쯧. 여보 오늘 저녁반찬이 뭐야? 나의 심각한 고민은 타인에게는 그들의 저녁반찬보다 하위의 토픽인 것이다. 타인의 큰 상처는 내 손톱밑의 가시보다 덜 고통스럽다. 그게 어쩔수 없는 현실이었다. 

오랜 시도끝에 취업한 토론토 지하철공사 TTC 힐크레스트 오피스. 100년이 넘은 건물이다.

 

예수는 사랑 믿음 소망중 사랑이 으뜸이라 하였고 붓다는 슬픈 마음으로 타인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자비를 논하지 아니하였던가. 이 성현들의 거룩한 정신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공감이라는 가치를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고대하던 재취업이 되었으니 지인들에게 식사대접을 하기로 했다. 그 중 한 부부는 진실된 표정으로 그동안 정말 고생했다는 공감과 위로의 말을 건네었고 새 환경에 대해 여러가지로 관심을 가지고 계속 물어주었다. 참 고마웠다. 이 분은 내가 구직을 할 때 여기저기 이력서도 찔러주고 소개도 해주었던 분이다. 또 한 부부는 그런 거추장스러운 위로나 축하의 말은 일절 다 생략하고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음식만 쩝쩝거리며 먹으면서 대화라고는 음식맛 평가만 하다가 돌아갔다. 정말 추잡하고 밉살스러웠다.

 

공감이란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나의 고통을 타인이 대신해 줄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을 알아주는 마음, 위로해 주는 마음, 같이 아파해주는 마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스한 느낌으로 전해진다.

 

고통받는 사람을 위하여 그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사람을 성인이라 하고, 그 고통을 알아주고 같이 아파하는 사람을 군자라 하며, 고통받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즐거움만 논하는 사람을 잡놈이라 한다. 직장 못 구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반년만 놀았으면 좋겠다고 매화타령이나 불렀던 나는 잡놈이었다. 진짜 완벽한 잡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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