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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생각

의심생암귀(疑心生暗鬼)

민아네 2012. 3. 25. 01:25

[다른곳에 썼던 글인데, 정작 내 홈페이지에는 없어서, 그런 글들을 모아서 올립니다.]

동화작가 권정생의 오랜 동지인 이현주 목사가 기록한 일화를 소개한다.

권정생이 그 즈음 생긴 아동문학협회상 첫 수상자로 선정되어, YMCA 강당에 기름기 흐르는 양복쟁이들 무리 사이에 꾀죄죄한 농부 차림으로 나타나서 상을 받은 후, 안동에서도 오십리를 더 들어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일어난 일이다.

시상식 후 회식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가 초라한 행색으로 회식자리에서 행여 소외라도 당할까 염려하여 어서 집에 가시라고 등을 떠밀었다 한다.

그렇게 영주까지 가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아주 더럽고 초라한 거지가 보였다. 그는 누가 버린 사과를 줍더니 그걸 먹는데 껍질은 물론 사과속과 씨까지 싸그리 다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쪽에 어떤 노인이 뒷주머니가 불룩하도록 두터운 지갑을 꽂고 돌아서 있는데 그 거지가 사과를 먹으며 그 지갑을 뚫어지게 보면서 슬슬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 노인에게 소리쳐서 경고를 해주어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그 거지는 손을 뻗어 지갑이 꽂힌 주머니에 대었는데 그 순간 거지는 잽싸게 노인의 옷에 묻은 지푸라기를 떼어버리고는 사과를 우적우적 씹으며 사라져버렸다.

여러 글에서 언급이 되는것으로 보아 이 사건은 그에게 어지간히 충격이 되었었나보다.

중국 고사에 의심생암귀(疑心生暗鬼)라는 말이 있다. 의심은 어두운 귀신을 잉태한다는 뜻이다.

의심을 하는 순간 그 거지는 세상에 둘도없는 더럽고 흉악한 소매치기였는데, 의심이 걷히니 순식간에 무소유의 성자가 되었다. 그러니 의심이란 실로 암흑의 귀신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일런지도 모른다.

도둑과 성자의 차이가 이렇게 간발의 차이라면 세상 살면서 내 눈에 그토록 밉상으로 '찍힌' 이들과 나의 둘도없는 세상의 동지나 친구와의 차이는 얼마일까.

혹시나 내 마음속에 생긴 의심이라는 암귀에 휘둘려 다른이들을 내 맘대로 적과 동지로 둔갑시키지는 않았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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