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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생각

허선촉주(虛船觸舟)

민아네 2012. 3. 25. 01:24

[다른곳에 썼던 글인데, 정작 내 홈페이지에는 없어서, 그런 글들을 모아서 올립니다.]

 

허선촉주(虛船觸舟)라는 말이 있다. 빈 배와 부딫친다는 소리다.

뱃사공이 배를 저어가는데 다른 배가 슬며시 와서 툭. 부디쳤다. 뱃사공이 노발대발하여 도데체 어떤 놈이 배를 그따위로 젓는가? 하며 욕이라도 한사발 해 줄 생각에 상대 배를 보니 배 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배 스스로 바람따라 물결따라 흘러 흘러 다니다가 사공의 배에 와 부딫친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고서야 사공은 화가 스르르 풀려 허허 웃고 말았다. 바람과 물에 욕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상에 남 탓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은 살면서 '씹는' 재미 없이 어찌 살아갈까 싶다.

한국에서 회사생활을 할 때 계단실에 모여 담배 한까치씩 나눠 피우며 상사들 씹고 찧고 하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고 퇴근후 동기들과 한잔 할라치면 안주는 역시 부장 씹는 안주가 최고였다.

여기 직장이라고 다를까? 조금 친하다 싶어 말이 트이면 은근히 다른이들을 씹는것으로 너와 나는 같은편이라는 동질감을 즐기는 것은 똑 같다.

아마 씹고 씹히는 행위가 말로만 이루어기에 다행이지 가령 대상이 옷이고 그 행위가 물리적으로 이루어진다 가정한다면 아마 지금 모든 사람들의 행색은 너덜너덜하게 되어 온 거리는 거지행색을 한 사람들로 뒤덮이지 않을까 싶다.

해서 사람들은 너덜너덜한 행색을 깨끗한 와이셔츠와 넥타이로 한꺼풀 덮고 얼굴에는 역시 훈련된 미소를 걸고 활기찬 걸음걸이로 사무실 문을 들어서는 것이다.

행여 나만은 씹히는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환상은 말 그대로 환상 그 자체이니 포기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겠다.

지금 내 인생에 세번째의 직장을 다니고 있다. (다른 이들과 모여 같이 일 한다는 의미에서 군생활도 직장이라
생각하면 네번째겠다.)

헌데 지난 직장에서 핏대올리고 욕하고 싸우고 심지어 주먹다짐도 있었던 그때 일을 지금 생각해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오면서 왜 그때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말 그대로 내가 욕을 쏟을 미운놈들이 타고 있던 배가 아무도 타지 않은 허선(虛船)으로 보이는 것이겠다.

왜 진작에 빈 배를 보듯 초연하지 못하고 조그만 충돌에 죽자사자 달려들었을까? 얼마 긴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이렇게 잊혀질 것을. 왜 그 사람들과 좀 더 좋게 지내지 못했을까? 기실 내 마음이 설레이고 분노가 일었던 것은 그 연유를 보면 나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씹는 재미는 일단 접어두고 바람을 보듯 자연을 보듯,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살 일이다.

생각은 그렇게 하지만 회사 곳곳에 밉상들이 보이는 걸 보면 나도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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