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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과 사진/캐나다에서

인연

민아네 2024. 2. 14. 14:50

2016년 4월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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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동네 공원에서.


몇년전 오랜만에 한국에 갔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껏 혼자만 품고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몇 년 사이에 서울 거리는 완전히 상전벽해라, 안그래도 길치인 나는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압구정동의 무슨 카페에서 친구와 약속을 잡았지요.

그 곳도 친구가 지하철역에서 나오면 바로 코 앞에 있다 했는데 나는 그것도 못 찾아 빙글빙글 돈 후에야 찾았습니다. 카페는 참 럭셔리했지만 그곳에서 제일 저렴한 커피값도 나에게는 호되게 비쌌습니다.

그런데 30분이 늦도록 친구가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휴대폰도 없이 다녔던 나는 참 난감하더라구요. 친구의 휴대폰 번호도 몰라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뭐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그냥 느긋하게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카페에는 특이한 사람이 혼자 커피를 마시며 앉아있더군요. 뒷모습만 보였는데, 스님이었습니다. 스님이라고 강남 카페에서 커피 마시지 말란 법은 없지만 그래도 승복하며 시원한 헤어스타일이 눈에 안 띌 수가 없었지요. 왜소한 뒷모습이 청초해 보이기도 해서, 나는 신문을 보며 가끔씩 곁눈질을 하며 앉아있었습니다.

결국 친구는 나타나지 않아서,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었지요. 카운터에서 돈을 지불하면서 그 스님이 있는 쪽을 무심히 잠깐 보게되었는데, 그때서야 그 스님이 여승(비구니)인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얇은 금테안경을 쓴 그녀의 얼굴은 깨끗한 삭발과 어우러져 더욱 정갈하게 정돈되어 보였지요.

타인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는게 실례일 것 같아서 얼른 시선을 거두는데, 그 스님도 앉은 채로 나를 뚫어지게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금방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가까이서 보니까, 아까는 알아채지 못했던 그녀의 나이가 느껴졌습니다.

- 혹시.. 옛날에 봉천동에 ㅇㅇ 교회 다니던.. ㅇㅇ이... 아니세요? 나 혜란이..

나는 머리속이 혼란스러워져서 한참을 인상을 찌푸려가면서까지 기억을 더듬어야 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몇 가지 기억의 단서를 더 주고나서야 겨우 추억의 끈을 잡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옛날 옛적 내가 그토록 좋아하고 따랐던 교회 누나였습니다. 교회 누나가 머리깎고 승복 입고 내 앞에 나타나다니 기묘한 우연이 유머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누나라고는 해도 고작 한살 차이인데다가 생일로 따지면 1년 차이도 나지 않는 그냥 동갑이나 마찬가지인 누나였습니다. 호칭만 누나지 친구처럼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영리하고 예쁘고 밝은 그녀는 늘 무리에서 분위기를 리드했고 다들 그녀를 좋아했었습니다. 

그중에는 은근히 연모의 감정을 품었던 철부지들도 있었고 나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곤 했기에, 대부분 그냥 잠깐의 속앓이로 끝나버렸지요.

- 어!! 누나! 누나 맞구나! 나 이렇게 중늙은이 아저씨가 다 됐는데 어떻게 알아봤어? 

곧이어서 ( 누나는 이게 뭐야?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살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왜 중이 됐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기어나왔다가 꾹꾹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그녀는 대답대신 잔잔하게 웃을 뿐이었습니다. 어차피 친구와의 약속은 파토가 났으니 이 기묘한 인연이 베풀어 준 만남으로 약속을 대신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나는 다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내 앞에는 오랜 세월의 간격을 두고 스님이 되어 나타난 그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다해도 세월은 아직 옛날의 그 귀엽고 예쁜 미모를 완전히 가리우지는 못해보였습니다.

스님에게는 어떤 말투를 써야 할 지 순간 망설여졌습니다. TV나 영화에서 보면 스님에게는 ~그랬지요, 이렇습니다, 스님 ~ 하십니까? 이렇게 정중한 말투를 쓰던데...

- 얘, 너 결혼은 했지? 애는 몇이니?

그것은 순진한 혹은 무지한 생각이었습니다. 누나는 옛날 철없던 고딩시절의 그 말투 그대로였습니다. 우리는 한참을 지난 얘기를 했습니다. 마치 지난 추억의 세월로 돌아간 듯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 얘, 그거 생각나? 애들끼리 강촌에 놀러갔다가 다른애들하고 시비 붙어서 쌈도 못하는게 덤비다가 너 두들겨 맞고 눈탱이 시퍼렇게 멍들고 쌍코피 터지고... ㅎㅎㅎ

- 맞아 맞아! 근데 나는 가만히 있는데 왜 누나가 울고불고 그 난리를 피웠지? ㅎㅎㅎ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필시 중늙은이 아저씨와 여승이 깨방정을 떨며 젊은이들마냥 떠드는 모습이 무척 이채로왔을 것입니다. 거센 소나기가 가는비로 변하듯 대화가 잦아들 무렵 문득 그녀가 말했습니다.

- 너 그거 알아? 나 너 많이 좋아했다?

그녀는 이제 그런 속세의 중생사에는 초월했다는 듯 이 말을 하면서도 무심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가슴속에는 무엇인가가 쿵 떨어졌습니다. 놀라웠습니다. 그녀는 늘 그 친절함과 상냥함을 모두 공평하게 나누어주었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였다니...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 누나. 누나 지금 어떤 절에 있어?

누나는 잔잔하게 웃을 뿐 대답이 없습니다. 스님들은 사람의 만남에 집착하지 않는다더니, 이 누나도 이 순간이 지나면 훌훌 미지의 장소와 시간으로 사라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왠지 목이 메이면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누나는 종이로 된 커피잔 받침을 뒤집어 무엇인가를 적었습니다.

- 울지마. 외국에 사는 너를 산 속 절에서 수행하는 내가 이제 언제 다시 보겠니? 안 그러려고 했는데, 여기 내가 있는 절 이름을 적어놓을 테니까 내가 간 다음에 봐.  나는 간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겠지.

누나는 나에게 천천히 합장을 한 후에 훌훌 떠나갔습니다.

누나가 카페 문 밖으로 사라진 후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커피잔 받침을 뒤집어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절 이름이 적혀있었습니다.



만 우 절.

사족) 
허탈하게 카페를 나서는 나에게 종업원이 매우 진지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손님! 먼저 가신 분 커피값 계산하셔야지요"